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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걷다

파이 이야기. 호랑이는 있었을까?

by 낙타 2021. 5. 22.

옛날 어느 나라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이 있었습니다. (...)
이 나라에는 원형 경기장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똑같이 생긴 문 두 개가 있었는데
죄인은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의 문 뒤에는 호랑이가 있습니다.
만약 죄인이 그 문을 선택하면
굶주린 호랑이가 달려 나와
몸을 갈기갈기 찢긴 채 죽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문 뒤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습니다.
만약 그 문을 선택하면 죄인은 무죄로 인정되고
그 미녀를 무조건 아내로 삼아야 했습니다. (...)
왕에게는 딸이 한 명 있었습니다.
꿈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아름다운 공주였습니다.
그런데 공주는 신분이 낮은 한 청년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왕은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왕은 청년을 심판하기로 하였습니다. (...)
공주를 사랑하는 청년이 경기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습니다.
이제 그는 미녀를 얻든 호랑이에게 죽든
공주와는 결혼할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입니다. (...)
공주는 오른손을 난간에 걸치고 집게손가락을 아주 빠르게
오른쪽으로 살짝 움직였습니다. (...)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오른쪽 문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그가 문을 열었을 때 안에서 나오는 것은
사나운 호랑이일까요, 아니면 미녀일까요? (이후 생략)
- [미녀일까? 호랑이일까?] 랭크 스톡턴 원작

파이 이야기에도 호랑이가 나온다. 이름은 리처드 파커. 캐나다의 소설가 얀 마텔의 2001년 작 소설인 [파이 이야기]는 망망대해에서 호랑이와 함께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 소년의 표류기라고 한다.

인도에서 미국으로 가기 위해 파이의 가족은 동물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있다. 배는 태평양에서 폭풍우를 만나 침몰하고 파이 혼자 구명보트를 타고 227일 후에 구조된다.

배가 침몰할 때 구명보트에는 탐욕스러운 하이에나.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 온순한 암컷 우랑우탄이 같이 타고 있었다. 바다를 떠도는 구명보트에서 배가 고픈 하이에나는 상처 입은 얼룩말을 잡아 먹고 대항하는 우랑우탄도 죽인다. 하이에나가 파이도 공격하려는 순간, 리처드 파커가 나타나서 하이에나를 죽인다. 이제 조그만 구명보트에는 거대한 벵골 호랑이와 열여섯 살 인도 소년이 남았다.

이 기묘한 팀은 태평양을 표류하며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모험담처럼 신기한 일들을 겪게 된다. 파이는 처음에는 리처드 파커를 죽이려 하지만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든 호랑이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파이는 점점 야성적으로 변해간다. 처음에는 채식주의자이기에 고기를 먹는 것도 고민을 하지만, 나중에는 동물을 날로 뜯어 먹는다.

파이와 리처드 파커는 굶어죽기 직전에 폭풍우를 만나 한 섬에 닿는다. 그 섬은 미어캣이 어마어마하게 있어서 굶주린 리처드 파커가 배불리 먹고, 맛 좋은 해초와 맑은 물이 있어 파이도 살기 좋은 섬이다. 하지만 파이는 밤이 되면 호수가 산성화 돼서 모든 게 녹아버리며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섬이라는 것을 알고 섬을 떠난다.

조난당한 지 227일 만에 구명보트는 멕시코의 바닷가에 도착하고 리처드 파커는 숲 속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그 후 파이는 멕시코 사람들에게 구조된다. 영화에서는 이 장면에서 화면이 약간 이상하게 변한다. 마치 꿈이었다는 듯이.

"호랑이는 존재해요. 구명보트도 존재하고, 바다도 존재해요. 당신의 좁고 제한된 경험에 그 셋이 다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거기서 벌어진 일을 믿지 않으려는 거예요. 하지만 침춤호가 그 셋을 한꺼번에 불러 모았고, 결국 가라앉은 거죠."

구출된 파이는 침몰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찾아온 일본 영사관 직원 두 명이 자신이 겪은 일을 믿지 못하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두 분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요. 놀라지 않을 이야기를 기대하겠죠. 이미 아는 바를 확인시켜줄 이야기를 말이에요. 더 높거나 더 멀리, 다르게 보이지 않는 그런 이야기. 당신들은 무덤덤한 이야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붙박이장 같은 이야기. 메마르고 부풀리지 않는 사실적인 이야기....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를 기다리죠.... 호랑이나 우랑우탄이 안 나오는. ... 하이에나나 얼룩말이 안 나오는 이야기.

이 이야기에서 배가 침몰하고 파이는 구명보트에 다리가 부러진 중국인 선원, 오렌지색의 옷을 입은 어머니, 그리고 험악한 프랑스인 요리사와 함께 살아남는다. 프랑스인 요리사는 선원이 죽을 수도 있다며 다리를 자르지만 결국 선원은 사망한다. 선원이 빨리 죽게 하려고 일부러 다리를 자른 것이다. 이 일로 요리사와 파이의 어머니는 다투게 되고 요리사는 시체의 살점으로 낚시를 한다.

요리사는 험악한 사람이었으나 그 덕분에 파이 모자는 목숨을 부지한다. 그러던 중 잡은 거북이를 파이가 놓쳐버리자 요리사가 화를 내며 파이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이 때문에 파이의 어머니는 요리사와 다투다가 살해당하고 바다에 던져진다. 다음 날 파이는 요리사를 죽인다. 요리사는 공격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죽는다.

"나는 두 분께, 그사이 227일 동안 일어난 일을 두 가지로 이야기 해드렸어요. ... 어느 이야기가 사실이든 여러분으로선 상관없고, 또 어느 이야기가 사실인지 증명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 묻는데요.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어느 쪽이 더 나은가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요.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요?"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질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 선택의 순간을 교묘하게 숨기기 위해서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는 길게, 환상적으로 묘사한다. 이 환타지도 살아남기 위한 파이의 투쟁과 내면의 갈등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동물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짧게 몇 페이지로 넘어가 버린다. 그래서 파이 이야기를 아름다운 판타지로 광고하는 영화 포스트가 나오는 것이다.

동화에서 미녀일지 호랑이 일지는 공주에게 달려있었다. 파이 이야기에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호랑이가 나오는 이야기인지 혹은 요리사가 나오는 이야기인지. 동화와는 달리 미녀가 아니라 흉악한 남자라는 것이 다른 점이긴 하다. 참으로 현실적이다.

호랑이인가? 요리사인가? 어느 쪽을 선택하던 아마 그때부터는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