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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걷다

서부해안 연대기 - 어슐러 K 르 귄의 성장소설

by 낙타 2021. 11. 17.

세계 3대 판타지 소설로는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어슐러 K. 르 귄의 '어스시 시리즈'를 꼽는다. SF계에서는 3대 작가라는 명칭도 있는데 아이작 아시모프와 아서 C.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을 가리킨다. 그러나 3대 판타지 작가나 3대 SF작가를 모두 합해도 수입면에서는 '해리포터'의 J. K. 롤링에 모자랄 것이다. 글테크로 성공을 거둔 최고봉이 '해리포터'다. 작가 J. K 롤링은 해리포터 시리즈로 하루에 10억 원을 벌었다고 하고 영국 여왕보다 재산이 많아진 지 한참이다.

어슐러 K. 르 귄은 판타지 소설뿐 아니라 SF 소설 작가로도 명성을 떨쳤다. 어슐러 K. 르 귄의 판타지 소설은 주로 '어스시 시리즈'에 속한다. SF 소설들은 '헤인 우주'라는 설정하에 쓰인 작품들이다. '어둠의 왼손', '로케년의 세계', '유배 행성', '환영의 도시', '빼앗긴 자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등의 장편과 단편들이 '헤인 우주'가 배경이다. 물론 이와는 전혀 다른 배경으로 쓰인 작품들도 많으며 그중에는 '라비니아', '하늘의 물레'처럼 널리 알려진 작품들도 있다. 날개 달린 고양이를 주제로 한 작품들도 있다.

'서부해안 연대기'는 '어스시'나 '헤인'이 아닌 다른 설정으로 쓰인 글들이다. 2007년에서 2008년에 걸쳐 출간되었으며 2008년 네뷸라상 수상작이다. 2018년 88세로 세상을 떠난 작가가 처음으로 발표한 청소년용 소설이다. 거의 여든이 다 된 나이에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그려냈다니 감탄할 수밖에. 정말 대단하다.


'서부해안'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은 '기프트', '보이스', '파워'라는 제목으로 차례대로 발표되었다. 작품들이 단편이라고 하기엔 길고 장편이라고 하기엔 어중간한 길이라서 '서부해안 연대기'라는 제목으로 합본해서 판매된다. 분위기는 '어스시'의 한 장소를 '헤인'의 어느 외진 행성으로 옮겨놓은 듯하다고 할까?

저자의 인터뷰에 의하면 이 시리즈는 판타지 소설이고, 세 권 모두 중심인물이 어른이 되어가는 젊은이다. 자신들의 재능이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성장기다. 그러나 그들은 용감하게도 자신들의 올바른 재능을 발휘하며 나아간다. '잘못된 재능'이 이 소설의 주된 아이디어다.

세 소설은 ‘서부 해안’이라고 하는 동일한 상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세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은 지리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각각  다르다. 시간으로도 어느 정도 차이가 난다.

첫 번째 이야기 '기프트'의 주인공은 고원 지대의 영주 가문 - 말은 거창한데 실은 가난한 목장이나 농장주 정도에 불과하다 -의 후계자 오렉이다. 오렉은 가문에 전해져 오는 파괴하는 능력을 이어받으리라는 기대를 받는다. 그래서 자신이 파괴하는 게 아니라 만드는 - 시를 짓는 - 잘못된 능력을 타고났다는 걸 알고 괴로워하게 된다.

두 번째 이야기 '보이스'의 무대인 안술은유롭고 아름다운 도시였으나 사막에서 온 정복자의 지배하에 고통을 겪고 있다. 어머니가 침략자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해 태어난 소녀 메메르가 '보이스'의 주인공이다. 메메르는 어머니로부터 이어지는 가문의 비밀스러운 재능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문자와 책이 금지된 도시의 시인, 그리고 책의 목소리를 듣는 소녀의 이야기다.

세 번째 이야기 '파워'는 본 것 모두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하는 노예 소년 가비르의 이야기다. 그 사실은 그와 누나만이 아는 비밀이다. 어린 시절이 흐르고 가비르가 보았던 미래의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다. 전쟁 중에 신뢰했던 주인 가족의 잔인한 행동에 누나가 목숨을 잃는다. 충격으로 넋을 잃은 가비르는 누나를 묻고 정처 없이 걷는다.

각각의 이야기의 끝에서 주인공들은 앞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만나게 된다. '파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렉과 메메르와 가비르는 모두 모이게 된다. 이들은 처해진 상황 탓에 자신들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아니, 능력 때문에 오히려 고통을 받지만 책과 이야기와 시에 대한 사랑으로 힘겨운 청소년기를 견뎠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고 피터 파크의 숙부는 가르쳐준다. 어찌 보면 스파이더맨에게 주어진 재능은 행복이다. 피터 파크는 손에서 거미줄을 쏘아서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고 악당과 싸우면 된다. 스파이더맨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별다른 고민 없이 빌딩 숲을 날아다닐 것이다. 끊임없이 한 눈을 파는 M. J 만 아니라면 스파이더맨은 행복할 것이다.

'서부해안 연대기'의 주인공들은 ‘기프트’, ‘보이스’, ‘파워’으로 상징되는 특별한 힘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들에게 주어진 재능은 마법과도 같다. 그러나 오렉과 멜과 가비르는 능력으로 인해 행복해지지 못한다. 그들의 초능력은 인생을 쉽게 만들어주거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받은 선물로 인해 남들보다 더한 고통을 겪는다. 작가가 말한 잘못 주어진 선물이란 그 점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 책과 이야기와 시에 대한 사랑. 이 험난한 세상에서, 갈팡질팡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세상에서,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도 어쩌면 책과 이야기와 시뿐일지 모르겠다. 심지어 나는 아무 특별한 능력도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