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재미 없을 때는 첩보물 - 콘돌 시리즈

낙타 2026. 3. 20. 17:51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성공하기를 꿈꾼다. 글쓰기를 꿈꾸는 이들도 다르지 않다. 원조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데일 카네기의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살기 위해서 쓰고, 쓰기 위해서 사는 삶." 아마 작가를 꿈꾸는 모든 이들의 희망일 것이다. 바이런처럼 "눈을 떠보니 유명해졌더라"고 말할 수 있기를, 조앤 K. 롤링처럼 책 한 권으로 세상을 바꾸고 부를 거머쥐기를 바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글쓰기의 바다에 발가락 끝만 담근 나 역시 그런 꿈을 품고 있다. 말하고 나니 새삼 부끄럽다.

그런데 스물세 살 청년이 처음 쓴 소설이 곧장 영화로 만들어지고, 그 주인공을 로버트 레드포드가 연기한다면?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1949년 미국 몬태나 주 셸비에서 태어난 제임스 그레이디는 지극히 평범한 청년이었다. 소설 쓰는 법을 익히며 워싱턴에서 의회 스태프로 일하던 그는 평일마다 같은 길을 걸었다. 정면이 납작하고 흰 치장 벽토를 바른 타운하우스 하나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낮은 검정 철제 울타리가 인도와 건물 사이의 경계를 조용히 가르고 있었고, 그늘은 창문의 형체를 흐릿하게 지웠다. 튼튼한 문 옆의 청동 명판에는 미국역사학협회 본부라는 이름이 당당히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건물을 드나드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었다.

픽션은 대체 현실을 창조해 낸다. 그리고 대다수의 픽션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에서 탄생한다. 내가 그 타운하우스를 살피던 순간, 역사를 바꿔놓은 두 개의 질문이 불현듯 떠올랐다. 만약 이 건물이 CIA의 위장 건물이라면? 만약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왔더니 동료들이 모두 죽어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할 법한 질문들이다. 그렇지 않나? - 작가의 고백?

그는 그 질문들을 소설로 써 내려갔다.

나는 소설 쓰는 법을 배우는 유일한 방법은…… 소설을 쓰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작가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 작가의 고백?

원고를 완성한 그는 서른 곳의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 절반이 답신을 보내왔고, 그중 여섯 곳이 출판 의사를 밝혔다. 무작위로 고른 한 곳에 원고를 보냈고,  편집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선인세는 1,000달러, 당시 그의 연봉의 10퍼센트가 넘는 금액이었다. 편집자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리는 이걸 영화로도 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1974년, 『콘돌의 6일』이 세상에 나왔다.

이듬해인 1975년,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에 시드니 폴락 연출로 영화화된 「코드네임 콘돌」은 세계적인 흥행을 거뒀다. 그런데 이 영화의 파장은 예상치 못한 곳까지 뻗어나갔다. 소련의 비밀정보기관 KGB에서 이 영화를 입수한 것이다. 그들은 영화 속 17부의 개념, 즉 '픽션을 분석해 정보로 활용하는 조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결국 KGB는 이에 영감을 받아 NIIRP라는 실제 조직을 창설하고, 소련 시민 2,000명을 채용했다. 몬태나 출신 스물세 살 청년이 '지어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픽션이 현실이 된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제이슨 본이나 제임스 본드 같은 특수 요원이 아니다. 그는 그냥 책을 읽는 사람이다. CIA 산하 17부 소속으로, 전 세계에서 출판되는 스파이 소설과 미스터리물을 읽고 분석해 실제 CIA 작전과 비교하는 일을 한다. 콘돌은 자신이 납치한 페이에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잘 들어요. 나는 CIA를 위해 일해요. 스파이는 아니에요. 그냥 책을 읽어요. 세계에서 출판된 모든 걸 읽죠. 플롯들을, 추잡한 수법들과 암호들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컴퓨터가 CIA의 실제 계획과 작전들과 비교하며 확인해요. 나는 정보 누설자를 찾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요. 모험물, 소설, 저널…… 그런데 대체 누가 이런 직업을 고안해 냈을까요?"

물론 위기의 순간, 그는 수십 권의 책에서 배운 대로 딱딱한 플라스틱 조각으로 자물쇠를 따려한다.

"그가 읽은 수십 권의 책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화에서, 주인공은 딱딱한 플라스틱을 이용해 몇 초 안에 문의 용수철을 열었다. 주머니를 미친 듯이 뒤진 그는 지갑을 열고 래미네이트를 입힌 CIA 신분증을 꺼냈다. …… 그날 쌓인 분노와 공포, 좌절감을 발판 삼아, 말콤은 결국 문을 향해 발을 날렸다."

그리고 결국 발로 차서 문을 열었다. 이론과 실전은 역시 다른 법이다.

그레이디가 창조한 이 설정, 즉 자신이 속한 조직으로부터 쫓기는 스파이라는 구도는 이후 장르의 하나의 원형이 되었다. 제이슨 본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에서 조직의 위협을 피해 달아나는 스파이들은 모두 콘돌의 후배들인 셈이다. 잭 리처 시리즈에 등장하는 아프가니스탄발 아편 밀수 에피소드 역시 어딘가 콘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이후 그레이디는 속편을 써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지만, 레드포드가 만들어낸 '콘돌'이라는 문화적 이미지와 경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콘돌을 멀리 날려 보냈다. 9·11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뉴욕을 덮은 연기가 걷힌 후, 콘돌은 다시 날아 돌아왔다.


속편 『콘돌의 마지막 날들』에서 그는 많이 달라져 있다. 문 하나 따지 못해 버벅거리던 책상물림 분석가는 이제 노련하고 능숙한 요원이 되어 있다. 작품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지만, 베트남이든 유럽이든 가릴 것 없이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임이 행간에서 느껴진다. 그러나 이제 그의 나이는 예순을 넘겼고, 스파이 세계에서 은퇴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세상도 바뀌었다. 공중전화 다이얼을 돌려 패닉룸에 연락하던 콘돌은 이제 휴대전화로 번호를 누른다. 머리 위 어딘가에 떠 있을 프레데터 무인기를 의식해야 하고, 구글 어스로 침투 경로를 미리 정찰한다.

무엇보다 소설 전체의 분위기가 『콘돌의 6일』과는 사뭇 다르다. 9·11 이후의 시대적 공기 탓인지,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무겁고 어둡다. 악몽에 시달리는 콘돌의 모습은 화려한 첩보 액션보다는 한 인간의 소진과 피로에 가깝다. 그렇게 콘돌 시리즈는 캐릭터의 성장보다 탄생과 쇠망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독특한 시리즈물이 되었다.

오늘날 『콘돌의 6일』은 윌리엄 골드먼의 『마라톤 맨』,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자칼의 날』과 함께 첩보 스릴러의 모던 클래식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