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서 흔히 마주치는 망초와 개망초는 생김새가 비슷합니다. 하지만 개망초가 조금 더 크고 화사한 미모를 자랑합니다. 어디서나 잘 자라는 강한 생명력 때문에 농부들에게는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구한말 이 꽃이 번지면서 나라가 망했다는 속설이 전해집니다. 그래서 망초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나라를 망친 것은 정작 사람인데 애꿎은 꽃에 허물을 씌운 셈입니다.
생김새가 달걀프라이를 닮아 '계란꽃'이라는 정겨운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꽃말은 '다정다감한 그대의 마음'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게 만들고 멀리 있는 사람은 다가오게 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름에 담긴 서글픈 사연과 달리 참 매력적인 꽃말이라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우리 시대의 탁월한 이야기꾼 천명관의 소설 [고래]에서도 개망초는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이 작품은 2004년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으며 문단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습니다. 작가는 독자를 단숨에 몰입시키는 흡입력이 탁월합니다. 사실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설화와 신화 그리고 무협지적 상상력을 자유자재로 넘나듭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 비견될 만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고래]는 한국 문학의 엄숙주의나 계도적인 틀을 깨부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오로지 재미와 상상력으로 무장한 새로운 문법을 제시하여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독자마다 호불호가 갈리기도 합니다. 소설이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천명관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결국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대답합니다.
문득 춘희는 담장 밑에 피어 있는 개망초를 발견했다. 그것은 벽돌공장 주위에 무수히 피어 있었을 뿐 아니라 그녀가 처음 금복의 손을 잡고 평대에 들어올 때 기찻길을 따라 줄지어 피어 있던 꽃이었다. 그녀는 반가움에 꽃을 만지려고 손을 내밀었다. 순간 주위가 대낮처럼 환해졌다. 멀리 감시탑 위에서 서치라이트가 그녀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 소설 고래 중에서
개망초는 배경이 되는 평대와 춘희의 삶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는 꽃입니다. 화려했던 욕망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폐허와 끈질긴 생명력을 동시에 상징합니다. 파멸 이후에도 지속되는 삶의 속성을 잘 보여줍니다. 춘희가 벽돌 공장에서 홀로 견뎌내는 긴 시간 동안 개망초는 유일한 친구가 되어줍니다.
작가는 변사의 말투를 빌려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과 생존을 경쾌하면서도 냉소적으로 그려냅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낯선 이야기 방식과 자극적인 묘사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기이한 이야기는 결국 지독한 외로움에 관한 기록입니다. 춘희의 외로움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책장을 금방 덮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요즘은 어딜 가나 길가에 개망초 몇 포기가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부산 금정산성 서문 앞에서도 하얗게 무리 지어 핀 군락을 보았습니다. 소설 속 처절한 생명력을 떠올리니 흔한 들꽃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외로운 마음을 알아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이 꽃처럼 다정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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