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흐. 이중섭의 삶과 예술혼

낙타 2021. 5. 15. 01:59

내가 만난 이중섭
김춘수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뼘 한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근대 화가들은 누구일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는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이 아닐까 한다. 이 세 작가는 2000년 이후에 특히 유명해졌는데 주로 그들의 고독하고 드라마틱한 삶과 높은 그림값이 그 이유다.

박수근의 작품은 국내 미술 경매 최고가인 45억 2000만원이고 이중섭은 35억 6000만원으로 2위. 김환기는 30억 5000만원에 낙찰 되었다. 어린 왕자는 이해 못 할 일이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교환가치로 평가하기에 당연하기도 하다.

이 세명의 화가는 그림값이 엄청나게 비싼데 정작 본인들은 가난에 시달렸다. 그들은 생활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예술이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을 겪었다. 자신의 작품을 살아 생전에 높은 값에 팔면서 인정을 받는 화가들도 있지만 시대를 앞서간 탓에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진가를 인정 받는 화가들도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예술의 장르 중에서 미술이 가장 불리한 듯하다. 베토벤이나 모짜르트 등 음악 예술인들은 생전에 높은 명성을 누리며 수입도 좋았고 귀족 아가씨들과 연예를 했다. 또 시인이나 소설가들은 어떤가? 대부분은 책을 출판해서 인세로 넉넉하게 살았다. 반면에 화가들은 가장 늦게 평가 받는 예술에 속하는가보다. 어쩌면 시대를 앞서간 화가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이 세상의 진실을 본 댓가로 그만큼의 고통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이건희 회장의 컬렉션으로 공개된 이중섭의 [흰소]

이중섭은 미국인이 자신의 소를 보고 "스페인의 투우와 같이 무섭군요"라고 하자 "뭐라고요? 투우라고요? 내가 그린 소는 그런 소가 아니고 착하고 고생하는 소, 소 중에서 한국소란 말이우다" 하고 "이제까지 보고 그리고, 다시보고 또 그린 소를 스페인 투우에 비교하다니 내 그림이 그렇게 보이면 나는 다 틀렸어."라고 밤새 울었다.

이중섭은 한국의 고흐라고 불린다. 고흐처럼 이중섭도 사후에 작품성과 드라마틱한 생애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삶은 고독이었고 그의 그림 자체가 삶이었다.

이중섭은 1916년에 평안남도 평원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소질을 인정받아 도쿄제국미술학교로 유학까지 갈 수 있었다. 이중섭은 미적 재능만큼이나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일본인들이 모인 곳에서 당당히 조선의 노래를 부르거나 조선인을 괴롭히는 일본인을 주먹으로 때려눕힐 만큼 자부심이 강하고 의기가 있었으며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그런 청년 이중섭을 일본의 양갓집 규수 야마모토 마사코가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중섭을 따라 조선으로 왔고 이름도 이남덕이라 지었다. 귀국한 이중섭은 마사코와 결혼하고, 원산의 중학교 미술 교사가 되었다.

이중섭과 이남덕 부부에게 행복은 잠시 뿐이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북쪽에서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제약 받고 이중섭은 사상을 비판받게 되었다. 사업을 하던 형이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가세도 기울게 된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다. 1.4 후퇴 때 미군의 수송함에 실려 내려온 사람들 중에 이중섭의 가족 4명도 있었던 것이다.

피난 생활은 가난만이 있었다. 전쟁 중에 화가가 먹고 살 길은 없었다. 종이 값이 없어 담뱃갑의 은지에 그림을 그린 이중섭의 은지화는 가난한 예술혼의 상징과도 같다. 결국 아내가 영양실조로 결핵에 걸렸고 아이들의 미래까지 암담해지자 1952년 2월에 부인과 아이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냈다. 마침 장인이 사망한 이유도 있다.

홀로 남은 이중섭이 외롭고 힘든 생활을 버티다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못 이겨 1953년 일본으로 밀항을 해서 가족을 만났다. 그러나 닷새 만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이중섭은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가족과 다시 살기 위해서는 전시회가 성공해야 했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했다. 전시회 작품 중 은지에 그린 작품 일부는 아이들의 벌거벗은 모습 때문에 풍기문란으로 철거되었다. 전시작 45점 중 팔린 20점도 그림 값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실패로 끝난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으나 예약을 하고 그림을 가져가지 않거나 그림을 가져간 사람들도 돈을 제대로 주지 않았던 것이다. 2월에 다시 대구에서 개인전을 열었지만 역시 실패로 끝났다. 황소와 미국인에 관한 일화도 대구 전시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두 차례 전시회 실패로 자신의 예술이 인정 받고, 기반을 마련하여 가족과 다시 만날 희망이 사라졌다. 실의에 빠진 이중섭은 정신분열 증상마저 보이게 된다. 결국 1956년 9월 6일. 마흔의 젊은 나이로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서 쓸쓸히 사망했다. 병원에서는 그의 시신을 '무연고자'로 분류했다.

이중섭의 그림은 그의 고단한 삶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가족을 그리며 그린 따뜻한 분위기의 작품들과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화풍은 짙은 감동을 준다. 무연고자로 쓸쓸히 죽음을 맞았던 이중섭이 오늘날의 스타가 되는 과정을 보면 예술가의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

오늘 엄마, 태성이, 태현이가 소달구지를 타고 아빠는 앞쪽에서 소를 끌면서 따스한 남쪽 나라로 가는 그림을 그렸어요. - 이중섭의 편지 중에서

이중섭의 황소에는 한가지 사연이 더 있다. 1952년 12월에 이중섭의 그림이 세 점 팔렸다. 그 중에는 [길 떠나는 가족]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중섭이 이 사실을 알고 구입자를 찾아가 그 그림을 돌려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길 떠나는 가족]은 얼마 전에 일본으로 떠나보낸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그린 작품으로, 차마 남에게 팔 수 없었던 것이다. 이중섭은 대신에 자신이 새로 그린 [황소]라는 작품을 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돌려받은 [길 떠나는 가족]은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나중에 부암동의 서울미술관을 세운 안병광에게 가게 된다. 그런데 2010년 이중섭의 [황소]가 경매에 붙여진다는 소식을 접한 안병광은 [황소]를 구입하는 조건으로 [길 떠나는 가족]을 경매 회사에 넘기게 된다. [황소]와 [길 떠나는 가족]은 1952년에 교환되었다가 2010년에 다시 교환된 것이다. 사실 안병광은 가난하던 젊은 시절 [황소]를 보고 마음이 끌려 수십 년 후에 서울 미술관을 만들었다.

이번에 삼성 이건희 회장 사후에 사회에 기증한 그림 중에는 이중섭의 작품이 104점이 포함되어 있다. 황소, 흰소, 바닷가의 추억 피난민과 첫눈 등. 작품들이 조만간 특별전 등으로 공개된다고 하니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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