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집 개똥철학.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공감 다이얼

낙타 2026. 9. 21. 15:34

트레킹을 마치고 막걸릿집으로 향했다. 해물파전에 막걸리를 놓고 나눈 이야기는 자녀들의 직장 생활이었다. 한참 유행하는 독감에 걸린 딸에게 고용주가 출근을 요구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다들 분개했다.

술자리에서 으레 그렇듯 설명충이 등장했다. - 접니다. - 나는 고용주가 직원을 한 사람의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고용주와 직원'이라는 라벨로만 보기 때문에 공감과 연민이 작동하지 않는 거라고 주장했다. 누가 나에게 술주정으로 그런 개똥철학을 늘어놓았다면 지루해서 막걸리를 얼굴에 뿌렸을지도 모른다. 끝까지 참고 들어준 친구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집에 돌아와 술이 조금 깨자 공감능력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사람의 감정 중에 가장 고귀한 것이 공감과 연민이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주요 종교가 표현은 달라도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핵심 교리로 삼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기독교의 박애, 불교의 자비, 이슬람교의 형제애, 유교의 인과 예. 다른 사람을 어질고 올바르게 대하라는 가르침들이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라는 것이 가장 순수하고 밀도도 짙은 것은 연민이다. 연민, 연민은 불쌍한 것에 대한 말하자면 허덕이고 못 먹는 것에 대한 것, 생명이 가려고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없는 아픔이거든요. 그것에 대해 아파하는 마음, 이것이 사랑이에요. 가장 숭고한 사랑이에요." - 박경리, 2004년 마산 MBC 특집 대담에서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는 공감능력이 없다. 전 세계적으로 사이코패스는 전체 인구의 약 1%, 소시오패스는 약 4%로 추산된다. 합쳐서 100명 중 다섯 명 남짓이다. 나머지 95%, 즉 우리 대다수는 정상적인 공감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대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이 왜 어떤 경우에는 타인에게 조금도 공감과 연민을 보이지 못할까?

기독교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그 기독교인들은 왜 흑인을 노예로 그렇게 가혹하게 부렸을까? 흑인을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고? 그 시대의 보편적인 생각이 그랬다고? 그렇다면 같은 기독교인들은 왜 유대인을 수용소에 가두고 학살했을까? 계몽된 현대의 일인데. 혁명을 이유로 특정한 사람들을 수용소로 보내고 처형한 사람들은 또 왜 그랬을까? 왜 한쪽 편에서는 빨갱이에게, 반대편에서는 지주와 특정 계급의 사람들에게 공감과 연민을 보이지 못했을까? 그들은 이웃에서 함께 자란 사람들이었다. 왜 고용주는 딸 또래의 직원이 독감에 걸렸는데도 며칠째 출근을 요구했을까? 자신도 독감을 앓아 봤을 테고, 자식이 아파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경험도 했을 텐데. 왜 다정하고 친절한 엄마가 백화점에서는 직원에게 갑질을 할까?

아주 평범한 사람들


학살은  5%의 반사회적 성격장애자가 벌일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이 1992년에 쓴 『아주 평범한 사람들』(Ordinary Men)은 독일 제101 예비경찰대대의 이야기다. 대대원은 함부르크 출신 노동자와 하급 사무직 500명 안팎이었다. 군대에 가기엔 나이가 많은, 평균 마흔 살 가까운 남자들이었고, 나치 이념 교육을 깊이 받은 사람들도 아니었다. 이들이 1942년 폴란드에 배치돼 유대인 학살에 투입됐다.

결정적인 장면은 7월 13일 요제푸프 마을이다. 지휘관 트라프 소령은 명령을 전하면서 눈에 띄게 괴로워했고, 하기 싫은 사람은 빠져도 좋다고 했다. 처음에 나선 사람은 열 명 남짓이었다. 나머지는 하루 종일 마을 사람들을 숲으로 끌고 가 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1,500명가량이고, 대부분 여성과 아이와 노인이었다. 이후 대대는 브라우닝의 추산으로 최소 3만 8천 명을 직접 사살하고 4만 5천 명쯤을 트레블링카로 보냈다. 빠진 사람은 10~20%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래도 불이익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 이 사례의 가장 불편한 대목이다.

브라우닝은 이유를 광신보다 평범한 압력에서 찾았다. 동료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은 마음, 권위에 대한 복종, 전시 상황에서 무뎌지는 감각, 이미 깔려 있던 반유대주의적 분위기 같은 것들이다. 반면 골드하겐은 독일 사회에 뿌리 깊은 절멸적 반유대주의가 있었다고 본다. 평범한 사람들이 했다는 데까지는 합의가 넓다. 왜 했는지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다이얼


연구자들은 일상의 갑질과 따돌림부터 역사적 대학살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타인에게 가하는 잔혹성의 근원에는 상대를 나 자신과 같은 '개인'으로 보지 않고 '라벨과 카테고리'로 분류하여 공감과 연민을 차단하는 기전이 작동한다고 본다

공감은 켜고 끄는 스위치가 아니라, 누구에게 얼마나 세게 향할지가 조건에 따라 조절되는 다이얼이다.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세고, 멀어질수록 약해진다. 실험이 있다. 같은 인종의 얼굴과 다른 인종의 얼굴이 바늘에 찔리는 영상을 보여주고 뇌를 촬영한다. 통증을 처리하는 영역은 같은 인종이 찔릴 때 더 크게 반응했다. 기본값이 애초에 "우리"다. 문제는 이 다이얼을 무엇이 돌리느냐다.

첫 번째 손은 권력이다. 갈린스키의 실험이 있다. 참가자에게 권력을 가졌던 순간을 떠올리게 한 뒤, 이마에 알파벳 E를 써보라고 한다. 자기 눈에 바로 읽히게 쓰면 마주 선 사람에게는 거울상이 된다. 권력을 떠올린 쪽이 그렇게 쓸 확률이 세 배쯤 높았다. 타인의 표정을 읽는 과제에서도 정확도가 떨어졌다.

블레이더는 같은 방식으로 지위와 권력을 갈라서 물었다. 성인 396명에게 높은 지위나 높은 권력을 가졌던 경험을 각각 떠올리게 하고, 관점 취하기 과제를 시켰다. 지위를 떠올린 쪽은 남의 관점을 더 잘 취했고, 권력을 떠올린 쪽은 덜 취했다. 지위는 남에게 존중받는 자리고, 권력은 남의 결과를 통제하는 힘이다. 백화점의 갑질 고객은 직원의 평가를 흔들 힘은 있고, 그 직원에게 존경받을 이유는 없다. 권력만 남는다. 물론 이런 프라이밍 실험은 재현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두 번째 손은 비용이다. 독감에 걸린 직원에게 출근을 강요한 고용주가 집에서는 아픈 가족을 극진히 돌보는 사람일 수 있다. 공감이 없어서가 아니다. 공감하면 대체 인력을 구하고, 매출을 포기하고, 자기 결정을 바꿔야 한다. 안 느끼는 쪽이 싸다. 사람은 가끔 그쪽을 택한다. 택했다는 것도 모른 채로.

세 번째는 라벨이다. 분류 자체는 죄가 없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개인으로 처리하며 살 수 없다. 의사, 학생, 노동자. 문제는 라벨이 개인을 덮을 때다. "노동자다"는 분류다. "노동자는 원래 무식하다"는 고정관념이다. "노동자는 열등하다"에서 위계가 되고, "목소리를 가질 자격이 없다"에서 배제가 된다. 단계마다 눈앞의 사람은 조금씩 지워진다. 난민 100명이라는 숫자와, 아이를 데리고 피난 온 한 가족은 같은 현실이다. 반응은 다르다. 앞은 범주고 뒤는 사람이다.

이 셋이 겹치면 판이 커진다. 위협 서사가 붙고, 벌레와 병균의 비유가 붙고, 명령이 내려오고, 분업 속에서 책임이 흩어진다. 배척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거든다. 아렌트가 평범하다고 한 악이 여기서 나온다. 규모를 줄이면 갑질과 따돌림이다. "눈치 없는 애", "부서의 구멍". 낙인 하나가 붙으면 집단 전체가 그 사람의 고통에 둔해진다. 총이 없을 뿐 구조는 같다.

다만 이걸 공감이 꺼진 것으로만 설명하면 모자란다. 상대를 인간인 줄 알면서 하는 경우가 있다. 결정을 먼저 내리고 라벨을 나중에 붙이기도 한다. 같은 조건에서도 요제푸프의 열 명처럼 빠져나온 사람이 있었다. 조건은 확률을 바꿀 뿐이고, 면죄부는 아니다.

경계


인간의 위험성은 공감이 없다는 데만 있지 않고, 그 조절이 권력과 이해관계에 따라 일어나면서도 당사자는 그걸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데 있다.

사이코패스는 공감이 없어서 위험하다. 평범한 사람은 공감의 경계가 옮겨지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 경계는 자연이 아니다. 흑인과 유대인, 노비와 빨갱이를 가르는 선은 누군가 그은 것이다.

선량하고 평범한 대다수가 사이코패스와 같은 냉혹함을 보이는 것은, 성격적 결함 때문이 아니라 라벨링을 통해 '상대의 인간성'을 가려버리는 사회적·심리적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적 학살을 막는 길이나 일상의 갑질과 따돌림을 해결하는 길은 동일하다. 라벨과 카테고리 뒤에 숨겨진 '한 인간으로서의 생생한 얼굴과 서사'를 다시 바로 보게 만드는 것, 즉 개별성의 회복이야말로 연민과 공감을 되살리는 가장 근본적인 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