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 -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찰

낙타 2021. 5. 24. 07:29

테이트는 토머스 무어의 시 한 편을 발견했다.

.... 그녀는 암울한 늪의 호수로 갔네
그곳에서 밤새도록 반딧불이 등불을 벗 삼아
하얀 카누를 저었지
머지않아 나는 그녀의 반딧불이 등불을 볼 테고
그녀의 노 젓는 소리를 들을 테고
우리 삶은 길고 사랑으로 충만하리라
죽음의 발걸음이 가까이 다가오면
나는 그 처녀를 사이프러스 나무에 숨기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 중에서


먼저 작가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 델리아 오언스는 동물행동학을 전공한 박사이다. 작가는 아프리카에서 7년 동안 야생동물을 관찰한 논픽션 세 편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평생 야생동물을 연구한 생태학자로 여러 학술지에 글을 실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그의 첫 소설로 2018년, 일흔이 가까운 나이였다. 작가의 이러한 이력은 습지에 대한 관찰과 묘사에서 힘을 발휘할 뿐 아니라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시각을 제공한다.

미국 남부의 노스캐롤라이나주 아우터뱅크스의 해안 습지는 '대서양의 공동묘지'로 불리는 지나가는 배들을 난파시키는 거친 곳이다. 어디가 육지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해안선을 그리기 어려운 미로처럼 얽힌 물길로 이어진 광대한 생태계이다. 늪과 못, 석호, 개펄, 바다가 이어지며 다양한 생명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또한 인간들에게 쓸모없어 보이는 이 습지는 궁지에 몰린 가난한 사람들, 범죄자들이 모여들어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곳이다. 번듯한 사회에서 발 디딜 곳 없는 사람들이 도망쳐서 단단하지 못한 습지 위에 판잣집을 짓고 살아가는 것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이 가득하다. 이 나이든 동물학자는 페이지를 시적인 문장으로 가득 채울 뿐만 아니라 한 시인의 이름을 빌려 직접 시를 쓴다. 장난꾸러기 작가다.

"꼬마 돼지만 집에 남았어요." 카야는 철썩이는 파도를 보고 말했다. ...
"이제 밥은 누가 해?" 카야는 소리 내어 물었다. 사실 '이제 누가 춤을 추지?'라고 묻고 싶었지만.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여섯 살 소녀의 성장담이다. 철저하게 혼자인 카야는 오빠가 떠나기 전에 가르쳐 준 늪지에서 도망쳐 숨는 법, 엄마가 가꾸던 작은 텃밭, 아빠가 정신을 차렸을 때 가르쳐 주는 낚시와 보트 모는 법, 가게를 하는 흑인 부부의 호의로 먹고 살아간다.

"다들 왔구나. 그런데 이렇게 많은 숫자는 셀수가 없는데."
우짖는 새들은 빙글빙글 돌다 자맥질하고 카야의 얼굴 근처에서 떠다니다 옥수숫가루를 던져주자 땅에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조용해져서는 가만히 서서 몸단장을 했다. 카야는 다리를 한쪽으로 모으고 모래밭에 앉았다. 커다란 갈매기 한 마리가 카야 곁의 모래사장에 내려와 홰를 쳤다.
"나 오늘 생일이야." 카야는 갈매기에게 말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고립과 외로움에 대한 관찰 보고서다. 늪지 외딴 곳에 있는 판잣집에 여섯 살짜리 여자애 하나가 홀로 남겨진다. 카야는 아이들의 놀림에 단 하루밖에 학교에 가지 않는다. 카야가 느끼는 이 절절한 외로움에 공감이 가지 않는다면 아마 이 책은 그저 흔한 수사 드라마 정도가 될 것이다.


가끔 알 수 없는 밤의 소리가 들려오고 코앞에서 내리꽂힌 번개에 소스라쳐 놀랄 때도 있었지만, 카야가 비틀거리면 언제나 습지의 땅이 붙잡아주었다.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때가 오자 심장의 아픔이 모래에 스며드는 바닷물처럼 스르르 스며들었다.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더 깊은 데로 파고들었다. 카야는 숨을 쉬는 촉촉한 흙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그러자 습지가 카야의 어머니가 되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로맨스 소설이기도 하다. 철저하게 자신을 고립시키며 살아가던 카야도 마을 청년 둘에게 차례로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습지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며 글을 가르쳐 주는 테이트. 마을 최고의 인기남이자 바람둥이인 체이스.

안전하게 몸을 사리고, 갈매기 먹이를 주고, 삶을 살아가며 보관할 수 있는 크기로 감정을 잘게 자르는 데는 도가 텄다.
하지만 외로움을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또한 수사 드라마이다. 외딴 곳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마을의 공식 미남이자 쿼터백 -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쿼터백은 곧 최고의 인기스타이다. 공부까지 잘하면 그야말로 '엄사친'으로 앞날이 보장된 영웅이다. - 이었으며 아버지의 정비소에서 일하는 체이스가 한밤 중에 소방망루에서 떨어져 죽은 것이다. 주변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법정 스릴러이기도 하다. 마을사람들은 습지에서 홀로 살아남은 여자아이 카야 클라크를 범인으로 의심한다. 보안관은 카야의 알리바이에도 불구하고 '마시걸 Marsh Girl' - 습지 계집애, 늑대의 아이를 체포해서 재판에 넘긴다.

외로움을 아는 이가 있다면 달 뿐이었다.
예측 가능한 올챙이들의 순환고리와 반딧불이의 춤 속으로 돌아온 카야는 언어가 없는 야생의 세계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한창 냇물을 건너는데 발밑에서 허망하게 쑥 빠져버리는 징검돌처럼 누구도 못 믿을 세상에서 자연만큼은 한결같았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여성주의, 페미니즘 소설이기도 하다. 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에 어머니는 집을 떠나고 형제들도 곧이어 뿔뿔이 흩어진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늪지 쓰레기", "백인 쓰레기"라고 부르며 경멸한다. 남자아이들은 밤에 외딴곳에 있는 카야의 집을 마크하고 가는 것을 성인식으로 여기고 카야의 '처녀'를 누가 가질 것인지 내기를 한다.

"다들 엄마 말 잘 들어. 이건 진짜 인생에서 중요한 교훈이야. 그래 우리 배는 좌초돼서 꼼짝도 못 했어. 하지만 우리 여자들이 어떻게 했지? 재밋거리로 만들었잖아. 깔깔 웃으며 좋아했잖아. 자매랑 여자친구들은 그래서 좋은 거야. 아무리 진흙탕이라도 함께 꼭 붙어 있어야 하는 거야, 특히 진창에서는 같이 구르는 거야."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자연에 대한 생생한 탐구의 기록이며 예찬이다.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수천 마리 흰기러기들이 우짖으면 다리가 긴 새들이 - 애초에 비행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듯 - 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습지 속 여기저기서 진짜 늪이 끈적끈적한 숲으로 위장하고 낮게 포복한 수령으로 꾸불꾸불 기어든다. 늪이 진흙 목구멍으로 빛을 다 삼켜버려 물은 잔잔하고 시커멓다. 늪의 소굴에서는 야행성 지렁이도 대낮에 나와 돌아다닌다. 소리가 없진 않으나 습지보다는 늪이 더 고요하다. 부패는 세포 단위의 작업인 탓이다. 삶이 부패하고 악취를 풍기며 썩은 분토로 변한다. 죽음이 쓰라리게 뒹구는 자리에 또 삶의 씨앗이 싹튼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또한 인간에 대한, 사회에 대한 기록이다. 인간은 자연에 기대어 산다. 그 안에는 우정, 사랑, 신뢰, 편견, 오해, 배신, 범죄로 가득하다.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시는 어떤 것인가? 여성은 어떻게 독립할 수 있을까? 인종과 사회의 계급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평생을 동물을 관찰하며 살아온 일흔 살 학자의 눈으로 관찰되고 기록된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찾은 것이다.


목숨이 걸린 궁지에 몰리면 사람은 무조건 생존본능에 의존한다. 생존본능은 빠르고 공정하다. 온유한 유전자보다 훨씬 강력하게 후세대로 물려 내려가는 생존본능은 언제나 필승의 패다. 윤리가 아니라 단순한 수학이다. 비둘기들도 자기네들끼리 싸울 때는 매와 다를 바가 없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어디일까?

"그냥 저 숲속 깊은 곳, 야생동물이 야생동물답게 살고 있는 곳을 말하는 거야. "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행동양식은 생물학의 세계다. 생물학에는 윤리나 도덕이 없다. 옳고 그름도 없다. 한 생명은 다른 목숨을 희생시켜 이어진다. - 여담이지만 채식주의자들이 이 소설을 어떻게 읽을까 궁금해진다.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에서는 다리를 다친 암여우는 새끼들을 버리고 간다. 자기 몸도 건사 못 하는데 새끼 먹이까지 챙기려면 엄마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새끼들도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엄마 여우는 새끼들을 버리고 몸을 치료한 다음에 다시 새끼들을 낳아서 기른다. 이런 가혹한 행위 덕분에 어미가 살아남고 더 많은 새끼들을 낳아서 키울 수 있다. 그렇게 세대가 이어진다.

재갈매기 부리에는 붉은 반점이 있다. 새끼들은 부모에게 먹이를 얻어먹으려면 그 붉은 점을 쪼아야만 한다. 붉은 반점이 더러워지거나 안 보여서 새끼들이 쪼지 못하면 부모는 잡아온 먹이를 주지 않고 새끼를 죽게 내버려 둔다.

암컷 반딧불은 꽁무니의 불을 깜박여 수컷에게 짝짓기 신호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낸다. 반딧불은 종마다 불빛 언어가 다르다. 암컷은 처음에는 자기들의 짝짓기 춤과 발광 신호를 깜박거린다. 수컷이 날아와서 짝을 짓는다. 그러다가 다른 짝짓기 신호를 반짝거린다. 그러면 다른 종의 수컷이 자기 종의 암컷이라고 착각하고 찾아오고, 암컷 반딧불은 수컷을 잡아먹는다. 암컷 반딧불은 신호를 바꾸는 것만으로 원하는 것을 구한다. 짝짓기 상대와 먹잇감.

수컷 사마귀가 나방을 먹고 있는 암컷 사마귀를 발견한다. 수컷 사마귀는 잔뜩 허세를 떠며 구애동작을 한다. 암컷이 반응을 보이자 수컷은 자신의 생식기로 암컷의 알을 수정시켜려고 이리저리 찌른다. 그 사이 암컷은 길고 우아한 목을 돌려 수컷의 머리를 물어뜯는다. 수컷이 열심히 교미하는 동안 암컷은 차분히 수컷을 한부분씩 먹는다.

가재가 노래하는 야생의 곳에서는 매 순간마다 이렇게 치열하게 영양분과 번식의 기회를 얻기 위한 투쟁이 벌어진다. 이것은 냉정한 수학이다. 경우의 수를 따지는 확률 게임이며 욕망과 냉혹한 판단이 자리한 곳이다. 인간의 행동양식은 어떨까? 얼마만큼 이성적이며 합리적이고 '인간적'라고 말 할 수 있을까?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어딘지 모르게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떠올리게 한다. 배경이 비슷해서 일까? [앵무새 죽이기]는 1960년에 출판 되었으며 1936년에 미국 남부에서 일어난 일을 어린 여자 아이의 시각에서 그리고 있다. 또 살인이 있고 재판이 있다. 인종 문제가 있으며 백인간에도 계층 간의 갈등이 있다. [앵무새 죽이기]에 나오는 가난한 백인 가족이 아마 카야의 모습과 비슷할 것이다.


일흔 살 동물학자가 평생 동물을 관찰하고 인간들의 세상에서 살면서 깨닫게 된 결론은 무엇일까?

카야도 결국 인간의 사랑이 습지 생물들의 엽기적인 짝짓기 경쟁보다 훌륭하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지만, 삶은 또한 태고의 생존본능이 복잡하게 꼬인 인간의 유전자 어딘가에 여전히 바람직하지 못한 형태로 남아 있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글을 쓰면서 스포일러를 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는데 쓰고 보니 모두 스포일러다. 여기까지 읽은 분이 있다면.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