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츠신의 삼체. 사냥꾼들의 우주

낙타 2021. 6. 23. 03:33

삼체는 중국 작가 류츠신의 SF소설이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뛰어난 SF작가들이 나온다. 류츠신은 [지구의 과거]라는 3부작을 발표했는데 1부 삼체, 2부 암흑의 숲, 3부 사신의 영생이다.


[지구의 과거] 시리즈에서 류츠신의 설정은 무척 극단적이다. 이건 차차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삼체]가 무슨 의미일까?

삼체는 삼체문제라고도 하는데 물리학에서 세 물체가 서로 중력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두 물체가 서로 미치는 영향을 계산할 수 있는데 - 뉴튼이 알아냈다. - 삼체문제에서는 일반적인 해를 구할 수 없다. 즉 계산 불가이다.

삼체 세계는 세 개의 항성 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에서 발생한 문명이다. 행성의 궤도를 미리 계산하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삼체 세계는 극도로 불안정하며 안정적인 외부 세계를 간절히 찾고 있다. 과학 기술이 매우 발달한 삼체 세계는 지구의 존재를 알게 되고 지구를 정복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한다. 이 시리즈는 그 이후 지구와 우주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반응과 사건들을 묘사한다.

두 개의 문명이 접촉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문명이란 무엇인지부터 짚어보자. 문명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겠지만 우리는 대우주 차원의 문제를 다룰 것이므로 문명에 대해서 거시적으로 다룬 아놀드 토인비의 정의를 빌려본다. 토인비는 그의 필생의 역작인 [역사의 연구] 시리즈에서 역사 연구의 기본 단위를 문명으로 정하고 문명의 변화를 '도전과 응전'이라는 요소로 설명했다. 토인비에 의하면 역사 연구의 이해 가능한 분야가 되는 공간적, 시간적 한계가 문명의 범위이며 인류의 역사적 경험의 본질과 패턴을 문명이라는 단위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1934년부터 1954년에 완성된 [역사의 연구]에 담긴 그의 역사관이 오늘날 주류 역사학으로 널리 대접받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삼체 세계에서 접하게 되는 문명들의 모습은 토인비의 정의에 완벽히 들어맞는다. 이 문명들은 발생해서 자라고 커져서 - 그때까지 살아남는다면 - 외부의 다른 문명과 만나게 된다. 지구 문명도 다른 외계 문명을 만날 수 있을까? 그 만나는 순간은 어떤 장면일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우리의 대화 상대가 될 존재에 대하여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계산해 보았다. 그 이후의 최신 이론도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이 정도로 대충 계산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계산식을 요약하자면 은하계에서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 행성의 비율에 생명이 탄생해서 발달하여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기술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비율을 곱하는 것이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내 생각에 이 계산식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후반부 생명의 탄생이나 문명의 발달과 같은 인자의 값은 우리가 알 수 없다. 그냥 적당한 값을 적어 넣을 뿐이다. 그래도 대충 예상하기로는 우주가 워낙에 넓고 별들의 수가 '바닷가 모래알만큼 많으니까' 최종 계산 값도 상당히 많지 않을까 하는 듯하다. 삼체 세계에도 우주에는 문명이 바글바글하지만 그래도 서로를 찾기 힘들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코스모스 486p  이 값들을 모두 곱하면 우리가 외계인을 만날 확률이다.

인류 스스로 생각해도 문명과 문명 사이의 만남은 그리 우호적인 것이 아니었다.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한 짓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 외계 문명이 우리에게 신대륙에 도착한 유럽인들처럼 할 것이라고 겁을 먹는 게 이해가 간다. 류츠신의 설정이 극단적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류츠신의 우주는 암흑의 숲이며 모든 문명은 사냥꾼이다. 류츠신은 이 문제를 우주사회학이라는 학문을 창안해서 설명한다. 우주사회학의 공리는 두 가지다. 첫째. 생존은 문명의 첫 번째 필요조건이다. 둘째. 문명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확장되지만 우주의 물질 총량은 불변한다. 생존과 자원의 한계. 생물학과 경제학의 우주 규모의 결합이라고 할까?

작품 전체를 통해 상상력이 기발하고 놀랍다. 그러나 상황을 너무 극단적으로 설정한 탓인지 논리적으로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부분들도 있다.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고 생각해보시라. '삼체'가 중국의 '문화혁명'을 묘사한다고 한다. 내가 문화혁명에 대해 몰라 어떤 부분이 문화혁명을 묘사하는지 알 수가 없다. 삼체 세계를 알고 난 후에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어서 문화혁명에 대해 모르더라도 납득할 수 있다. 세상에. 문화혁명을 묘사한 일들이 납득 가능하다니. 그게 더 무섭다.

토인비의 말을 하나 더 빌려와 보자. 그의 역사의 연구 제1권 서론의 제일 첫마디는 이렇게 시작한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자기들이 살면서 활동하고 있는 공동사회의 생각을 고쳐주는 것보다는 그 공동사회의 생각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예증이다."

소설가도 그렇다. 소설가들은 일반적으로 자기들이 살면서 활동하고 있는 공동사회의 생각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예증이다. 삼체 세계 같은 무시무시한 우주가 우리의 생각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 조그만 먼지 덩어리 위에서 노란 돌이나 검은 기름을 놓고 허구한 날 전쟁을 벌이고 서로 죽이는 것을 보면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다.

삼체에서 새로 배운 것이 있다. '청명상하도'라는 그림이다. 이 아름다운 그림에 대해서 알게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