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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걷다

이디스 워튼 - 순수의 시대

by 낙타 2021. 6. 29.

[순수의 시대 The Age of Innocence]는 이디스 워튼이 1920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몇 차례 영화화되었다. 국내에서 '순수의 시대'라는 드라마가 있어서 헷갈릴 수도 있겠다.


작품은 1870년대의 남북전쟁이 끝난 후의 뉴욕 상류사회가 배경이다. 변호사 뉴랜드 아처가 메이 웰랜드와 약혼하고 남편에게서 도망친 메이의 사촌 엘렌 올렌스카 백작 부인이 등장하며 시작한다. 엘렌은 남편과 이혼하려고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남편 곁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는 일을 뉴랜드에게 맡긴다. 뉴랜드는 점차 그녀에게 이끌린다. 그리고 그들의 세상이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엘렌만이 아니라 자신도 위선적인 관습으로 유지되는 삶의 피해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뉴욕의 상류사회는 엄격한 관습으로 유지된다. 귀족이 없는 미국에서 성공한 비누 사업가나 부유한 변호사 등이 모여 사는 거리가 미국의 상류 사회를 이룬다.  최상층에는 진짜 유럽 귀족이 자리 잡고 재판관 역할을 한다. 그들이 귀족 흉내를 내면서 행동하는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재미있다. 상류층은 어디나 어느 시대나 비슷한가 보다. 진정한 사치는 쓸데없는 것일수록 빛난다. 쓸모없는 것에도 낭비할 시간과 돈과 에너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엘렌과 뉴랜드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엘렌은 그토록 가기 싫어했던 유럽으로 떠나고 뉴랜드는 자신이 깨달은 기만적인 세계에 남아있기로 한다. 엘렌과 뉴랜드와 메이는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묻어두고, 모르는 체하면서 살았을까?

이디스 워튼은 1862년에 뉴욕의 전통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작가가 관찰한 뉴욕의 상류 사회의 모습과 유럽에서의 경험, 그리고 불행했던 결혼 생활이 이 소설을 만들어낸 것이리라.

순수의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들은 연약하지 않다. 엘렌을 키운 메도라 이모와 할머니 캐서린 밍곳 노부인은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또한 여리고 순진해 보이지만 메이도 약하지 않다. 그리고 엘렌이 보여주는 진정한 사랑과 용기. 1920년 대에 이와 같은 반항하는 여성상을 만들어낸 작가가 대단하게 여겨진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남자 뉴랜드인 것 같지만 오히려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것은 두 명의 여성이다.

[순수의 시대]는 식스센스 급의 반전이 있는 소설이다. 마지막 부분을 읽고 나서야 그때까지 은밀하게 주고받던 몸짓과 격식을 잔뜩 차린 대화가 무슨 의미였는지 이해가 된다. 말 그대로 소~~오름.

가짜임을 깨달은 세상에서 오히려 그것을 붙잡고 평생을 살아온 뉴랜드의 모습이 쓸쓸하기만 하다. 그에게 현실은 화려한 상류 사회의 겉모습이었을까, 아니면 엘렌을 통해 본 기만적인 모습이었을까? 세월이 흐르고 세상은 변해서 순수의 시대도 이제는 지나간 과거가 되었다.


“올라가는 것보다 여기 있는 편이 내게는 더 현실 같지,”
그는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의 마지막 그림자가 희미해질까 두려워 의자에 못 박힌 듯 꿈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짙어가는 어스름 속에서 발코니에 눈을 고정시킨 채 오랫동안 벤치에 앉아 있었다.
마침내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고, 잠시 후 하인이 발코니로 나와 차양을 걷고 덧문을 닫았다. 그것이 마치 기다리던 신호 이기라도 한 듯, 뉴랜드 아처는 천천히 일어나 호텔로 혼자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