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3
2021.12.12
부산 갈맷길 3코스 2구간
부산진시장에서 영도 남항대교 입구까지
운동거리 : 15.8km
소요시간 : 약 5시간
시작 인증대 : 범일2동 주민센터 앞
중간 인증대 : 용두산공원 시민의 종 종각 옆
종점 인증대 : 영도 흰여울 문화마을 거점센터. 남항대교 입구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전쟁으로 인한 피난생활의 애환이 묻어있는 코스다. 부산 갈맷길 3코스 2구간 시작점인 범일2동 주민센터에서 길을 건너면 부산진시장이 있다.
조선 후기에 부산진성 서문 밖에 4일, 9일장의 정기시장인 부산장이 있었는데 쌀 등 곡식과 건어물의 집산지이며 포목이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일대에는 평화시장, 자유시장이 있고 귀금속, 결혼 예물로 특화된 상가도 있다. 먹을거리도 많아서 친구들과 술자리로 혹은 회식을 하러 자주 가는 곳이다. 유서 깊은 시장답게 어디를 가도 음식이 맛있다. 젊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카페나 커피숍이 부족한 것이 흠이다.
현재의 부산진시장은 하나의 큰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1913년에 이불, 포목 의류 등의 품목으로 40평과 60평짜리 2동의 상설시장으로 시작된 것이 부산진시장의 시초다. 그 이후로 점점 건물의 크기를 키워가다가 1970년에 현재의 상가 건물이 세워졌다. 100여 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부산진시장은 혼수와 원단 특화 전문 시장으로 유명한데 서울 동대문시장, 대구 서문시장과 함께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 불리고 있다. 우리 어머니께서 자식들 결혼시킬 때마다 부산진시장에서 옷감을 떼서 한복을 맞춰오시던 생각이 난다. 내 결혼할 때 어머니께서 해주신 한복이 지금도 옷장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수의도 진시장에서 미리 해놓으셨다. 부산 경남권 사람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해온 시장이다.
부산진시장을 지나면 골목길로 이어진다. 내가 부산에서 35년을 살았지만 처음 가보는 길이다. 물론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이 이것뿐이겠냐마는 새삼스러운 마음이 든다.
무어 볼거리가 있을까 싶어서 가던 길에 주택과 상가 사이에 정공단 표지가 나타난다. 정공단은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정발 장군과 목숨을 바친 분들을 위해서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지낸 제단이다.
부산진성은 임진왜란의 첫 전투지였다. 조선 시대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개항한 부산포는 좌천동과 범일동 일대였다. 1592년 4월 13일(음력), 왜군 선발대인 소서행장의 1만 8000명이 700여 척의 배로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진성에는 600~1000명의 군사가 있었다. 정발 장군과 군사들은 패배를 알면서도 맞서 싸웠고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이 숨진 장소인 옛 부산진성 남문터에 제단을 쌓고 부산진성이 함락된 날인 음력 4월 14일이 되면 제사를 지냈다. 갑오경장 이후에 국비지원이 중단되면서 민간이 비용을 모아 치렀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이 제단을 폐쇄하고 우물과 비품을 강제로 빼앗았다. 광복 후에 주민들이 옛 비석을 되찾아 제사를 지내고 제단을 정비했다.
이곳에 있는 충장공 정발 전망비는 조선 영조 때 세워진 것인데 원래는 영가대에 세운 것이다. 영가대는 부산 갈맷길 3코스 1구간 부산진성 공원에서 보았다. 일제 강점기에 전차선로를 만들면서 영가대를 헐었는데 충장공 정발 전망비도 그때 이곳으로 옮겨졌다. 왜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정발 장군은 다시 일본에 의해 비석까지 옮겨졌다
부산 동구 초량동에 정발 장군의 동상이 있다. 부산진성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기로.
정공단에 들어갈 때는 못 보았는데 나올 때 매견시 목사를 기념하는 푯말이 보인다. 매견시 목사는 본명이 James Nobble Mackenzie이며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1910년에 한국에 도착해서 29년간 선교활동을 했다. 1912년에 한센병 환자를 돌보기 위해 요양소 '상애원'을 세웠다. 1928년까지 무려 4천2백60명의 환자를 수용하고 치료했으며 한센환자 사망률을 25%에서 2%로 감소시켰다고 한다. 부인 켈리 여사는 1919년에 한센병 환자들의 아이들을 위해 '미감아의 집'을 세웠다. 두 딸인 헬렌 맥켄지 (매혜란)와 케서린 맥켄지 (매혜영)는 1952년에 다시 한국에 와서 부산 좌천동에 있는 일신기독병원을 세우고 전쟁 중에 치료받지 못하는 고아와 산모들을 돌보았다.
매견시 가족만 아니라 왕길지(겔슨), 민지사(벨레)등 호주 선교사들이 부산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서구 기독교의 선교 활동에 색안경을 끼고 보는데 이렇게 개인의 치열한 희생정신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길 건너에는 항일 독립유공자 정오연의 생가터가 있다. 지금은 가게다. 인근에 왕길지 기념관도 있는데 셔터문을 내리고 있었다.
이 부분의 길은 '부산포 개항가도'에 포함된다. '부산포 개항가도'는 지하철 좌천역 3번 출구에서 시작해 부산포 개항가도 진입 골목(벽화) ~ 정공단·일신 기독병원 ~ 부산진교회 ~ 부산진 일신여학교 ~ 안용복 장군 기념 부산포 개항문화관 ~ 제일아파트 앞 경사형 엘리베이터 ~ ~ 증산공원으로 이어진다. 옛 부산포 일대를 지나며 임진왜란과 관련된 역사뿐 아니라 근대 일제강점기의 역사도 남아있는 공간이다. 길에 다양한 역사를 기록해 놓았으니 시간을 두고 찬찬히 읽으며 걸어보자. 저절로 공부가 된다.
조금 더 올라가면 3.1 운동 참여교회인 부산진교회가 있고 옆에 1905년에 호주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부산 경남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자 부산 최초의 3·1 운동이 시작된 부산진 일신여학교가 있다. 기미 독립선언문이 길가에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조금 더 걸으면 오른쪽에 안용복 도일선 전시관이 있다. 안용복 기념 부산포 개항문화관이다. 안용복의 생가는 좌천동에 있었다. 기념관에 올라가면 안용복의 생가를 표시하는 전망창이 있다. 어부 안용복은 조선 후기 울릉도와 독도에서 불법 어업을 일삼는 일본 어선에 항의하고, 조선의 독도 지배권을 확인시킨 인물이다. 문화관에는 연로하신 두 분의 도우미 해설사가 계셨는데 아주 반갑게 맞이하며 설명을 해주려고 애쓰셨다. '독도는 우리 땅' 노래를 불러보라고 해서 쫌 곤란했다. 의욕이 넘치신다. 안용복 도일선 전시관이라는 명칭은 마당에 놓여있는 그 당시의 배를 재현한 기념물을 가리키는 듯하다. 빌딩을 배경으로 하는 옛날 배가 색다른 느낌이다.
안용복 기념관 맞은편에 증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경사형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용하지 못하고 계단을 힘들여 올라가야 했다. 아마도 지금은 운행을 안 하나보다.
증산공원은 부산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증산은 부산의 한자 지명 ‘釜山(가마솥처럼 생긴 산)’의 유래가 된 산이란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부산은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이라고 이름하였고, 그 산 아래를 부산포라 불렀다'라고 기록되었다. 가마꼴과 같은 산이 범일동 자성대 - 부산진성으로 이름이 바뀐 - 가 위치한 산이라는 설도 있지만 대세는 좌천동 증산이 부산 - 가마솥 산인 듯.
부산진성에 대해서도 헷갈린다. 정리하면 임진왜란 이전에는 증산에 부산진성이 있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범일동에 있는 자성대를 고친 성이 부산진성이었다. 그래서 정발 장군이 싸우다 순국한 부산진성은 초량의 증산에 있고 부산진성 공원은 범일동에 있다.
증산공원의 전망대에서는 부산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멀리 바다가 보이고 항구의 크레인과 컨테이너가 보이는가 하면 오래된 주택가의 모습과 새로 솟아난 고층 빌딩과 아파트도 그 옆에 나란히 있다. 야경이 멋진 곳이라니 밤에 한번 오고 싶다.
발길을 부지런히 옮기다 보면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나타난다. 수정동의 성북 전통시장이다. 산복도로 전통시장을 도시재생사업으로 정비한 ‘웹툰 거리’다. 캐릭터가 곳곳에 그려져 있고 가게마다 취급하는 물건을 벽에 그려 놓았다.
예쁘긴 한데 나는 벽에 벽화나 웹툰을 그리는 '도시재생'이나 '도시보존'에 반대한다.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면 주거 환경이 좋아지는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덜 덥거나 덜 추워지는가? 여름밤에 모기가 줄어드는가? 오래된 골목길 주택가에 몇 년 살았다. 그때의 더위와 추위, 모기는 정말 지긋지긋했다. 오래된 동네는 박물관이나 관광지가 아니며 민속촌도 아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쾌적한 환경에서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반대한다면 그 동네에서 1달만 살아보고 말하자.
'부산포 개항가도'와 '초량동 웹툰 거리'는 부산의 '이바구'길에 포함되는 코스다. 경상도 사투리로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바구길을 안내하는 앱도 있다. 갈맷길과는 다른 부분이 많으므로 꼭 걸어보고 싶은 길이다. 부산에 놀러 온다면 광안리, 해운대, 자갈치도 좋지만 색다른 경험으로 이바구길 같은 코스도 꼭 가보기를 권하고 싶다. 부산의 옛 기억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큰 길이 나온다. 성북고개를 오르는 길이다. 우리는 그 길을 내려간다. 어디서 봄직한 오래된 동네가 좌우로 펼쳐지고 그사이로 언뜻언뜻 바다도 보이고 항구도 보인다. 이 코스에도 볼거리가 많다. 구봉산 봉수대, 싱싱 테마로드, 초량 돼지갈비골목, 중앙공원 등...
초량 차이나타운에 도착, 주민센터의 외관이 이렇다. 초량에는 구한말에 청나라의 영사관이 있었고 그 주위에 중국인들의 주택과 상점이 있었다. 그곳에 화교들이 몰려 살면서 초량 차이나 타운이 되었으니 100년이 넘었다.
거리가 온통 빨간 등과 빨간 간판으로 덮여있다. 이곳은 원래 미군과 러시아인들이 많이 찾는 거리였다. 러시아 음식점들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중국 바람에 조금 밀려났나 보다. 중국 본토 음식을 맛볼 수도 있다.
40계단 입구에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조각상이 있다. 한눈에도 가난해 보이는 피난민 가족의 모습과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 옆을 지나는 오늘의 아이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중앙동에 도달했다. 중앙동, 남포동, 광복동이 지금은 화려한 쇼핑몰과 카페로 가득하지만 한국전쟁의 아픈 기억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40계단.
40계단은 1909년 ~1912년 사이에 생겼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물 밀 듯이 내려온 피란민들은 산 위에 판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지금은 빌딩이 가로막지만 그 당시에는 40계단에서 영도 다리가 보였다. 피란민들은 40계단에 앉아 영도다리를 바라보며 피란생활의 고달픔과 향수를 달랬다. 40계단은 1953년에 대화재로 본래 모습을 잃었는데 원래 위치에서 남쪽으로 25미터 떨어진 계단을 현재는 40계단이라고 부른다. 1951년 박재홍이 부른 '경상도 아가씨'가 크게 유행하면서 유명해졌다. 계단 중간의 조각 작품은 '아코디언 켜는 사람'이며 힘든 생활 속에서도 낭만을 간직했던 모습을 표현했다. 조각상 근처에 가면 '경상도 아가씨' 노래가 들리고 가사가 기록되어 있다.
피난 시절에 부산에서 방을 구하는 고달픔을 묘사한 소설이 있었는데 황순원이었던가?
백산 기념관. 백산 안희제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임시정부의 자금을 조달하였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1943년에 고문으로 사망했다.
조선시대 초량 왜관의 문서를 보관하던 '동향사' 표지판을 지나서 부산 영화체험 박물관 앞을 지난다. 코로나 때문인지 문을 닫고 있다.
용두산은 부산항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산의 모양이 백두대간이 바다로 내려가는 거대한 용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용두산이라고 하였다. 이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 몰려든 피란민들의 주거지로 판자촌이 형성되었는데, 1954년 12월 대화재로 많은 이재민을 내었다. 용두산공원에는 부산탑이라고도 하는 120m 높이의 용두산공원 부산타워가 있는데 1973년 당시 국내 최고 높이였다. 또 부산시민의 종은 부산시민의 모금으로 1996년 12월 31일에 건립되었는데 3.1절, 광복절, 제야의 종 3회에 걸쳐 타종을 한다. 백산 안희제 선생의 동상도 입구에 있다.
공원 중앙에 동상이 서 있는데 이순신 장군 동상 같다. 이순신 장군 동상이 왜 여기에 서 있을까? 동상은 1955년에 세운 것이다. 1980년에 이순신 장군의 부산포해전의 승전일인 10월 5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정했다. 부산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할 것이다. 나도 처음 알았다.
용두산공원에는 산책로와 꽃시계가 있고 문화공연장, 부산 출신 시인의 시비, 벽천폭포 등이 있다. 광복동에서 올라오는 진입로 주변에는 여러 가지 디스플레이와 조명도 설치하여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용두산공원을 내려와 부산 근대역사관으로 향하는 모퉁이 손수레에서 호떡을 사 먹었다. 흔히 보는 두꺼운 호떡이 아니라 속이 비어있고 얇고 바삭바삭한 호떡이었다. 부부로 짐작되는 두 분이 열심히 호떡을 굽고 있는데 수화를 나누는 모습이 한분은 장애가 있으신가 보다. 호떡이 맛있었다.
부산 근대역사관은 공사 중으로 2022년 중반은 되어야 재개장할 모양이다.
이제부터는 부산의 명물이 줄줄이 있다. 보수동 중고책 골목이 근처에 있고 국제시장, 자갈치 시장, 남포동 PIFF광장 등이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
영도다리 밑에 유라리 광장이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국도 7호선의 시점과 종점이라는 뜻이다. 국도 7호선이 그렇게 멀리 가던가? 잘 모르겠다.
유라리 광장 한쪽에 피란민 가족을 묘사한 조각이 있다. 영도다리! 거~서 꼭 만나 재이. 보따리를 이고 지고 온 가족이 피난길을 나서며 혹시 손을 놓칠까 봐 만날 장소를 정하던 애달픈 마음이 들어있다. 그 앞에 벤치에 잠깐 앉아 있다. 영도다리! 거~서 꼭 만나 재이. 깔깔깔. 지나가는 젊은 사람들이나 가족들이 그 말을 읽으며 깔깔거리고 지나간다. 지난 역사의 고통스러운 장면도 이제는 우스개 거리가 되었다. 괜찮다. 그런 아픈 기억은 겪지 않고 느끼지 못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다. 과거의 고통을 강요하면 꼰대다.
영도다리는 1932년 처음 만들어진 도개식 다리다. 다리를 들어 올리는 퍼포먼스 때문에 전국적으로 명물이 되었다. 잃어버리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는 약속도 그래서 나왔으리라. 지금 있는 다리는 기존의 영도대교가 노후화되면서 안정성이 문제가 되어 기존 다리를 철거하고 복원했다. 오후 2시에 다리를 들어 올린다.
원래의 갈맷길 3코스 2구간은 영도 깡깡이 마을을 지나 남항대교 입구까지 가는 것이지만 여기서 일단 멈춘다. 영도로 들어가면 버스를 타고 돌아 나와야 하는 것이 귀찮게 여겨져서다. 영도대교 입구의 지하철 남포역에서 일단 귀가.
12.21일에 남은 코스 다시 시작. 영도대교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멋지다.
영도대교를 건너면 바로 현인 동상과 노래비가 있다. 부산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영선동에서 보낸 현인은 '신라의 달밤'으로 인기 가수였다. 1950년 전쟁을 피해 고향으로 내려와서 발표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금순이에게 안부를 전하고 다시 만날 때까지 굳세게 잘 지내기를 바라는 내용이다. 전쟁의 참상에 대한 절묘한 묘사로 피난민들에게 위안을 주고 아직까지 널리 애창되고 있다. 최근 영화 국제시장에도 삽입되었다. 원래는 노래가 나오는데 이날은 고장이 났는지 조용했다.
조금 더 걸으면 깡깡이예술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19세기 후반 대한민국 최초로 발동기가 장착된 배를 만든 '다나카 조선소'가 세워졌던 장소다. 7,80년대에 원양어업 붐을 타고 선박 수리로 유명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잘 살려서 깡깡이 예술마을을 만들었다. 지금도 십여 곳의 수리조선소와 200백 여 개에 달하는 공업사와 선박 부품업체가 남아 있다. 고층 아파트가 있는데 아파트 상가에 세탁소 편의점이 아니라 선박 부품업체들이 들어서 있다고. ‘깡깡이’라는 이름은 수리조선소에서 배 표면을 망치로 두드릴 때 ‘깡깡’ 소리가 난다 하여 생겨난 말이다. 이 날도 여러 군데서 망치 두드리는 깡깡이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지금은 옛날 같은 호황은 아닌 모양이다.
남항대교 방파제에 있는 빨간 등대가 보인다. 이 등대를 지나서 영도대교와 부산대교 밑으로 배들이 지나간다. 남항 방파제 위로 난 길을 편하게 걷는다. 거의 다 온 것이다. 종점 즈음에 아파트가 바다 옆에 서 있다. 이 아파트에 사는 친구의 말로는 베란다에서 낚시를 할 수 있단다. 실제로 와보니 허풍인 것 같기도 하고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절영해안 산책로 입구다. 갈맷길 3코스 2구간과 3코스 3구간 인증대가 있다. 갈맷길 4코스 1구간도 이곳에서 출발해 남항대교를 건너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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