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듣는 현대의 모든 음악은 사실 단 12개의 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적어도 체계화된 음악은 12음계 안에서 모든 멜로디가 탄생하고 기록되죠. 그래서 저작권을 가릴 때도 악보 그 자체보다 이 12음의 이어짐을 핵심으로 봅니다.
칼 젠킨스의 팔라디오를 듣다가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Sir Karl Jenkins – Palladio, conducted by Andrzej Kucybała
info https://gr.afit.plAleksandra Domarecka, Magdalena Kruczała – violinAndrzej Kucybała – conductorStanisław Moniuszko School of Music Orchestra in Bielsk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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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에 10개의 음표를 사용한다고 가정할 때 표현 가능한 가짓수는 12의 10제곱, 즉 약 620억 개에 달합니다. 엄청난 숫자 같지만 인류가 이 음계로 음악을 만든 지 벌써 300년이 넘었는데, 이제는 나올 수 있는 멜로디가 다 바닥나야 정상 아닐까요? 하지만 놀랍게도 세상에는 여전히 매일 새로운 음악이 쏟아져 나옵니다.
음악적 우주가 300년이 넘도록 고갈되지 않은 비결은 단순한 음높이 너머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계산한 620억이라는 숫자는 사실 시작일 뿐입니다. 여기에 리듬이라는 변수가 더해지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같은 '도레미'라도 길이를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수만 가지 표정이 생겨납니다. 여기에 여러 옥타브를 넘나드는 범위,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화성의 깊이, 그리고 악기마다 가진 고유의 음색까지 더해지면 그 경우의 수는 관측 가능한 우주의 별 개수보다 많아집니다. 후덜덜...입니다.
이런 무한한 가능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곡 중 하나가 바로 칼 젠킨스의 팔라디오입니다. 광고 음악으로 익숙한 이 곡은 18세기 바로크 음악의 유전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걸작입니다. 제목을 르네상스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이름에서 따왔지요. 음악 역시 정교하게 설계된 건축물처럼 단단한 구조미를 자랑합니다.
12음계라는 엄격한 규칙 안에서 짧은 음형을 반복하며 긴장감을 쌓아 올리는 방식은 마치 잘 깎인 다이아몬드처럼 차갑고도 강렬한 에너지를 내뿜습니다.
팔라디오가 유독 매력적인 이유는 고전적인 합주 협주곡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현대적인 비트감과 미니멀리즘이 뛰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은 웅장한 대리석 신전인데 그 내면은 세련된 현대인의 박동을 닮았다고 할까요? 정교한 형식미와 현대적 리듬감의 조화를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이 곡이 주는 이지적인 희열에 깊이 공감하실 겁니다. 가장 오래된 규칙인 고전 형식 안에서 가장 최신의 감각을 끄집어냈다는 점이야말로 음악이 가진 진정한 마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스타일은 흔히 '네오-바로크'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바흐나 비발디 시대의 음악은 사실 현대의 '재즈'나 '팝'처럼 반복되는 베이스 라인(Basso Continuo)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대 작곡가들은 이 고전적인 반복 구조가 현대인의 귀에도 아주 잘 맞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죠.
만약 팔라디오의 이런 분위기에 매료되셨다면 막스 리히터가 재해석한 비발디의 사계나 필립 글래스의 현악 사중주 미시마도 꼭 들어보시길.
Recomposed by Max Richter: Vivaldi - The Four Seasons, The Unsung Collective
Conducted by Dr. Tyrone Clinton, The Unsung Collective performs in St. Philip's Episcopal Church, Harlem NYViolin soloist Michael JorgensenSpring 1 0:00Sp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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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곡의 고전적 뼈대는 유지하되, 특정 구절을 현대 음악처럼 반복시키거나 (Loop), 베이스 라인을 강조해 힙합이나 일렉트로닉 음악 같은 리듬감을 부여했습니다. 특히 'Spring 1'은 팔라디오의 산뜻하면서도 강렬한 추진력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String Quartet No. 3 “Mishima” | Philip Glass
Apollo Chamber Players presents String Quartet No. 3 "Mishima" by American composer Philip Glass. Performance as part of ‘Houston Melharmony’ season conce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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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음악의 거장 필립 글래스의 곡으로, 영화 《미시마: 그의 인생의 네 장》의 삽입곡입니다. 철저하게 계산된 반복적 구조(미니멀리즘)가 주는 형식미가 일품입니다.현악기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리듬이 굉장히 현대적이며 이지적입니다.
Ezio Bosso - Unconditioned (Following, A Bird)
Music video by Ezio Bosso performing Unconditioned (Following, A Bird).(C) 2016 Sony Music Entertainment Italy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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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치오 보소 (Ezio Bosso) 의 'Following a Bird'는 피아노 선율이 주를 이루지만, 그 밑바닥에 흐르는 고전적인 화성 진행이 매우 탄탄합니다. 정교하게 짜인 리듬이 반복되면서 서서히 감정을 고조시키는 방식이 현대적이면서도 우아합니다.
고전의 뼈대 위에 현대적인 반복과 리듬을 심어 넣은 이 곡들은 12음계라는 제한된 세상이 얼마나 더 넓어질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최근 들었던 곡 중 어떤 음악에서 이런 '새로운 우주'를 경험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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