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 7

일단 노트는 샀다. 폴 오스터의 신탁의 밤

「생각은 진짜일세.」 그가 말했다. 「말도 진짜고. 인간적인 모든 것이 진짜일세.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설령 우리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어떤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미리 그것을 알게 되지.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내면에는 어느 순간에나 미래가 있네. 어쩌면 그게 글쓰기의 전부 인지도 몰라, 시드.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 말일세.」- 신탁의 밤 | 폴 오스터폴 오스터의 《신탁의 밤》을 읽다가 노트를 사러 나갔다.소설 속 주인공 시드니는 긴 병에서 겨우 회복한 뒤 산책을 하다가 포르투갈에서 만들어진 파란 노트를 산다. 그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한 날부터 주변에 기묘한 일들이 벌어진다. 소설이니까 그렇겠지, 싶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자리에..

2026.03.24

인생이 재미 없을 때는 추리소설 -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 & 제나로 시리즈

이름은 본질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잘못된 이름은 정체에 대한 오해를 일으킨다.SF소설이라는 이름이 그렇다. Science Fiction이라고 하면 우주선, 외계인, 로봇, 인공지능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그것들이 SF소설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슐러 르 귄의 말처럼 SF의 본질은 "은유"다. 스타워즈는 광선검과 제다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선과 악,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이야기다. 외계인은 '타자'에 대한 은유이고, 로봇은 '인간성'에 대한 질문이다.추리소설도 오해하기 쉬운 이름이다. 아서 코난 도일에서부터 히가시노 게이고까지, 추리소설에는 언제나 명석한 형사나 탐정이 범인의 트릭을 깨고 진범을 찾아낸다. 그러나 추리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트릭이 아니다. 추리소설의 껍데기는 '누가 범인인가..

2026.03.23

인생이 재미 없을 때는 첩보물 - 콘돌 시리즈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성공하기를 꿈꾼다. 글쓰기를 꿈꾸는 이들도 다르지 않다. 원조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데일 카네기의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살기 위해서 쓰고, 쓰기 위해서 사는 삶." 아마 작가를 꿈꾸는 모든 이들의 희망일 것이다. 바이런처럼 "눈을 떠보니 유명해졌더라"고 말할 수 있기를, 조앤 K. 롤링처럼 책 한 권으로 세상을 바꾸고 부를 거머쥐기를 바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글쓰기의 바다에 발가락 끝만 담근 나 역시 그런 꿈을 품고 있다. 말하고 나니 새삼 부끄럽다.그런데 스물세 살 청년이 처음 쓴 소설이 곧장 영화로 만들어지고, 그 주인공을 로버트 레드포드가 연기한다면?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1949년 미국 몬태나 주 ..

2026.03.20

국경과 언어를 넘어온 선물, 『애린 왕자』와 『압록강은 흐른다』

니가 내를 잘 길드리모 니는 내한테 이 시상에 하나뿐이 없는 장미가 되는기다 - 애린 왕자 중에서세상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문학 작품 중 하나인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최근 아주 특별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습니다. 바로 경상도 사투리로 옷을 갈아입은『애린 왕자』입니다.이 책의 탄생 비화는 무척 흥미롭습니다. 전 세계의 희귀 언어와 방언으로 『어린 왕자』를 번역해온 독일의 출판사 '틴텐파스'에서 한국의 방언에 주목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포항 출신의 최현애 작가가 번역을 맡았습니다. "니가 내를 잘 길드리모 니는 내한테 이 시상에 하나뿐이 없는 장미가 되는기다"라는 구수한 울림을 만들어냈네요. 이 독특한 매력이 SNS를 통해 화제가 되며 독일에서 한국으로 '역수입'되는 진풍경을 연출했습니다. ..

2026.03.18

천명관의 고래​와 금정산성 서문에서 만난 개망초

길가에서 흔히 마주치는 망초와 개망초는 생김새가 비슷합니다. 하지만 개망초가 조금 더 크고 화사한 미모를 자랑합니다. 어디서나 잘 자라는 강한 생명력 때문에 농부들에게는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구한말 이 꽃이 번지면서 나라가 망했다는 속설이 전해집니다. 그래서 망초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나라를 망친 것은 정작 사람인데 애꿎은 꽃에 허물을 씌운 셈입니다.생김새가 달걀프라이를 닮아 '계란꽃'이라는 정겨운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꽃말은 '다정다감한 그대의 마음'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게 만들고 멀리 있는 사람은 다가오게 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름에 담긴 서글픈 사연과 달리 참 매력적인 꽃말이라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우리 시대의 탁월한 이야기꾼 천명관의 소설 [고래]에서도 개망초는 중요한 상..

2026.03.13

부녀대작

초봄의 기운이 완연한 4월의 월요일 아침입니다. 출근 준비로 바쁜 와중에 딸아이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집니다.딸 : 빠. 잠깐만.빠 : 왜?딸 : 나 왜 이렇게 예쁘?빠 : ... 내가 낳았지.딸 : ...빠 : 아버지 어머니 예쁘게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해봐.딸 : 아~버~지~ 어~머~니 고~맙~습~니~다~아~빠 : 태도가 맘에 안드네?딸 : ㅎㅎㅎ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온 딸이 다시 말을 겁니다.딸 : 옷 이쁘지?빠 : 응. 힙하네?딸 : 오~. 아빠가 힙을 알아? 엉덩이 말고.빠 : 월요일 아침부터 불쾌한데?딸 : ㅋㅋㅋ어느덧 저녁이 되고 치맥을 즐기며 대화는 깊어집니다. 요즘 유행하는 성격 유형 질문이 빠질 수 없습니다.딸 : 아빠 T야?빠 : (사람의 성격은 단순하지 않고 다층적인 거란다... ..

2026.03.13

[단상]가면을 벗고 나를 만나는 연습

어릴 적 나는 숫기가 없었고 사람 대하기를 무척 어려워했다. 지금은 사회생활을 제법 잘하는 편이다. 오랜 시간 세상 풍파에 깎여 둥글게 변한 모양이다. 실제 기분과 상관없이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지낸다. 명랑하게 행동하는 것은 사회적 생존을 위한 나의 적응 기제였다. 하지만 밝은 모습과 내면 사이의 괴리감은 나를 지치게 했다. 내가 쓴 명랑한 가면은 페르소나다. 사회적 요구에 맞춘 가면과 참 자기 사이의 간극이 커질수록 에너지는 고갈된다.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는 느낌은 오히려 깊은 고립감을 불러왔다.타인에게 늘 좋은 모습만 보이려는 욕구는 버림받지 않으려는 두려움의 발현일지 모른다. 나는 타인의 일에 마음의 벽을 치며 나를 보호해왔다. 사회적 가면을 유지하느라 쏟은 에너지가 너무 커서 선택적 집중을..

2026.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