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혹은 콩깍지의 유통기한

낙타 2026. 6. 10. 08:53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패러디했습니다.
with gemini & claude


"지은아, 저기 좀 봐. 또 하나 떨어졌어."

성미가 베란다 창문에 이마를 박은 채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침대에서 닭다리를 뜯던 룸메이트 지은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베란다 난간에는 두 달 전 성미가 남친 재현과 다이소에서 2천 원 주고 산 '대망의 강낭콩 키우기 세트' 화분이 덜렁 놓여 있었다.

"뭐가 또 떨어져. 낙엽 지는 가을에 콩잎 떨어지는 게 자연의 섭리지."

"아니, 내 눈의 콩깍지 말이야."

성미가 가슴을 쥐어짜며 극적으로 돌아섰다.

"처음 만났을 땐 재현 씨 콧구멍에서 나오는 코털조차 '자유를 갈망하는 예술적 영혼의 깃털' 같았어. 그런데 어제 뼈다귀 해장국 먹는 걔를 보는데... 웬 멧돼지 한 마리가 골수를 빨고 있더라고. 이제 저 화분에 남은 콩잎은 딱 두 장이야. 저게 다 떨어지면 내 환상도 끝이야. 우린 헤어지는 거라고."

지은이 양념치킨 소스가 묻은 손가락을 쪽 빨며 차갑게 대꾸했다.

"가시나 지랄하네. 그냥 사랑의 유통기한이 지난 거야. 떡볶이 시키게 카드나 줘."

다음 날 저녁, 눈치 없는 남친 재현이 성미의 집 앞으로 찾아왔다. 그의 패션을 본 성미는 가슴이 턱 막혔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무릎이 발목까지 마중 나온 청바지. 심지어 바지 끝단에는 검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성미야! 내가 너 주려고 완전 대박 아이템 구해왔어!"

재현이 가방에서 꺼낸 것은 동대문에서 덤핑으로 떼온 듯한, 거대한 캐릭터가 그려진 주황색 형광 커플티였다.

"이거 입고 내일 모레 센텀 쪽으로 드라이브 가자! 완전 인싸 같겠지?"

그 순간, 성미의 머리에서 '콰광-' 하고 콩깍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성미는 고개를 돌려 베란다를 바라보았다. 마침 불어온 바람에 콩잎 한 장이 가차 없이 날아가 버렸다. 이제 남은 콩잎은 단 한 장.

"재현 씨."

"응?"

"우리 시간을 좀 갖자."

"어? 왜? 티셔츠 사이즈가 작아? 큰 걸로 바꿔올까?"

"저기 베란다 화분 보여? 저기 마지막 남은 콩잎 한 장이 내 마지막 사랑이고 환상이야. 내일 아침, 저 잎마저 떨어지면... 우린 정말 끝이야. 다신 연락하지 마."

성미는 차갑게 문을 닫아버렸고, 재현은 복도에 멍하니 남겨졌다.

그날 밤, 하늘도 이 황당한 이별 위기를 애도하는지 천둥번개를 동반한 역대급 폭풍우가 몰아쳤다. 대형 태풍급 바람이 아파트 창문을 세차게 두들겼다.

침대에 누운 성미는 눈물을 흘렸다.

'끝이구나. 이 정도 바람이면 저 가녀린 강낭콩 잎사귀는 진작에 안드로메다로 날아갔겠지. 잘 가라, 나의 멧돼지 같던 첫사랑...'

같은 시각, 아파트 단지 뒤편 쓰레기 분리수거장.

재현은 비장한 눈빛으로 폭우를 맞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칠성사이다 페트병과 3M 절연테이프, 그리고 다이소제 주방용 가위가 들려 있었다.

"내 연애를 고작 강낭콩 따위에게 맡길 수 없다..."

재현은 이를 악물고 칠성사이다 페트병을 잎사귀 모양으로 서툴게 오려내기 시작했다. 손이 저려오고 빗물이 눈을 가렸지만, 그의 가위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생애 가장 처절한 예술 활동이자, 영혼을 갈아 넣은 '걸작'의 서막이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성미는 무거운 마음으로 베란다 문을 열었다.

"어...?"

눈을 의심했다. 그 모진 풍파 속에서도, 나뭇가지들이 부러져 나가는 태풍 속에서도, 화분의 마지막 콩잎은 당당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심지어 어제보다 훨씬 더 파랗고, 윤기가 흐르다 못해 아주 형광빛으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지은아! 지은아 일어나 봐! 콩잎이 안 떨어졌어! 이건 기적이야! 하늘이 우리 사랑을 축복하는 거라고!"

비명을 지르는 성미의 목소리에 지은이 부스스한 머리로 베란다로 나왔다. 지은은 가늘게 눈을 뜨고 콩잎을 응시하더니, 이내 화분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잎사귀를 톡톡 건드려 보았다.

탁. 탁.

경쾌한 플라스틱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성미야."

"응? 왜? 너무 감동적이지?"

"이거 강낭콩 잎 아니라 칠성사이다 패트병인데?"

"어?"

자세히 보니 그랬다. 초록색 플라스틱 패트병을 정교하게 잎사귀 모양으로 잘라, 줄기에 초록색 청테이프로 무려 9겹을 칭칭 감아놓은 인공 조화였다. 심지어 잎사귀 표면에는 네임펜으로 '잎맥'까지 세심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때, 성미의 휴대폰이 울렸다. 재현의 어머니였다. 전화를 받은 성미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어휴, 성미 학생? 우리 재현이가 지금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어서 연락했어. 이 미친놈이 새벽 3시에 쓰레기봉투를 우비 삼아 쓰고 남의 집 베란다에 매달려 있다가 경비 아저씨한테 도둑으로 몰렸대지 뭐니? 도망치다 미끄러져서 가스 배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구조됐는데, 손에는 웬 청테이프를 꼭 쥐고 있더라니까... 지금 가벼운 저체온증에 발목이 부러져서 실려 갔어. 혹시 무슨 일인지 알아?"

성미는 멍하니 칠성사이다로 빚어진 '마지막 콩잎'를 바라보았다.

새벽의 폭풍우 속에서, 가스 배관에 매달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청테이프를 감았을 그 패기 가득한 바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비록 센스는 빵점이고 패션은 엉망진창이지만, 자신과의 이별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가짜 콩깍지'를 연성해 낸 그 무식한 진심.

"하..."

성미의 입에서 깊은 한숨과 함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멧돼지 같아 보였던 재현의 얼굴이 다시 아주 조금은 귀여운 아기 돼지 정도로 보이기 시작했다.

"지은아."

"왜. 병원 가냐?"

"어. 가서 그 인간 등짝 좀 반으로 접어놓고 올게."

성미는 옷걸이에 걸려 있던 주황색 형광 커플티를 껴입으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베란다 창밖, 절연테이프로 단단히 고정된 칠성사이다 잎새는 아침 햇살을 받아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시게 초록빛을 발하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