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고양이가 좋아하는 사람. 저는 후자입니다. 응?
고양이들의 떠들썩한 놀이판을 보고 왔습니다. 뮤지컬 캣츠.
캣츠 40주년 기념으로 한국 공연 중입니다. 부산의 드림씨어터에서 3, 4월 볼 수 있어요.
다들 아는 사실. 뮤지컬 캣츠는 T. S. 엘리엇의 시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를 기반으로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작곡을 하고, 1981년 영국 런던 웨스트 앤드에서 초연을 했습니다. 1982년 브로드웨이에 진출해서 세계에서 흥행에 가장 성공한 뮤지컬 중 하나입니다... 라고 검색하면 어디서나 대충 비슷한 내용이 나오네요.
T. S. 엘리엇은 '황무지'라는 시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 분이죠. 4월이 되면 다들 한번씩 인용해 보는 "사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어,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그 시 말입니다. [황무지]의 1장 '죽은 자의 매장' 첫 부분입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시 중 하나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황폐해진 문명과 비인간성을 묘사한 시입니다.
이렇게 삭막한 시를 쓴 양반이 고양이를 관찰하고 아이들을 위해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 (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 를 썼습니다. 시인의 위대함이랄까요?
제목 번역에 대해 약간의 이의가 있습니다. Old Possum은 엘리엇의 별명이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한국어 번역은 "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시를 읽어보면 지침서 느낌은 아니거든요. Practical이 '현실적인, 실용적인, 실제적인, 현실성 있는'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내용도 엘리엇이 고양이를 연구해서 '고양이의 실제 모습은 이렇다'하고 들려주는 형식입니다. 차라리 뮤지컬 제목을 빌린 '캣츠'라는 제목이 더 어울리는 듯합니다.
캣츠,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레미제라블. 이렇게 묶어서 세계 4대 뮤지컬이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세계 4대 뮤지컬, BIG 4라... 모두 흥행에 대성공하기도 했고 규모로 봐서도 엄청난 작품들이기는 합니다. 무대 위로 배가 다니고 헬리콥터가 실제로 등장하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음악과 거대한 무대 장치, 화려한 의상, 철저하게 훈련된 배우들의 연기까지 그야말로 엄청난 돈을 들인 느낌이 팍팍 나는 작품들이죠. 그래서 BIG4인가? 예술작품이 투자의 크기로 우열을 가릴 수 있던가요? 아. 물론 캣츠나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의 작품성에 대해서 제가 평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능력도 없구요. 미스 사이공은 예외입니다. 상당히 짜증나는 스토리입니다. 제목부터가 요즘은 성 차별로 손가락질 당하기 좋은데다 내용은 무슨 나비부인도 아니고 - 나비 부인도 싫어합니다. - 아무튼 미스 사이공은 안볼 겁니다.
BIG4작품의 공통점은 모두 영국의 프로듀서 카메론 매킨토시에 의해 기획 제작되어 웨스터엔드에서 성공을 거두고 미국과 세계로 장기 공연을 한 흥행 대작이지요. 그러니 '영국 웨스트엔드의 BIG4'라거나 '카메론 매킨토시의 4대 뮤지컬'이라고 하면 상관 없겠지만 '세계' 4대 뮤지컬이라는 호칭은 글쎄요. 그런 걸 누가 정할 수 있나요? 다행히 요즘은 이런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잘 없습니다. 한국의 뮤지컬팬들이 저런 얄팍한 상술에 넘어갈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카메론 매킨토시는 캣츠의 성공에 힘입어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레미제라블등의 대작을 연이어 기획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기사로 임명되기까지 했습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도 에비타, 지지스크라이스트슈퍼스타 등을 작곡했고요. 이 두 사람이 만드는 뮤지컬은 메가 뮤지컬Mega Musical이라고 해서 크고 아름답고 누가 봐도 '아. 돈 좀 들었구나'하는 작품들입니다. 고비용 고수익 구조라고나 할까요. 현대 자본주의가 대단한 것이 이런 창작품에도 돈만 충분히 들이면 인재들을 모아들여 어느 정도 하는 결과물들을 낸다는 것입니다. 디즈니랜드나 픽사의 작품들을 보세요.
원작에는 15편의 시가 있습니다. 1편 '고양이 이름짓기' 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편 '모건 고양이, 자기 소개하다' 까지 다양한 고양이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용상으로는 '고양이에게 말걸기'가 마지막으로 어울리지만요. 뮤지컬에서도 시작할 때의 합창 '고양이 이름짓기'부터 마지막 '고양이에게 말 걸기'까지 원작시를 대부분 사용합니다.
엘리엇은 젤리클이라는 특별한 고양이를 창조해 냅니다. 고양이들의 소망이죠. 젤리클이라고 불리는 고양이들이 공터에 모여 젤리클 고양이만의 무도회를 엽니다. 젤리클 고양이들은 기쁨과 행복의 노래를 부르며 젤리클 달이 뜨는 젤리클 무도회가 열리기만을 기다리죠. 서양에서는 고양이의 목숨이 9개라고 한다지요. 예전에 '배트맨과 캣걸'인가요. 고양이의 도움으로 죽음에서 부활한 고양이를 닮은 섹시한 히어로가 나오는 영화가 기억나네요.
껌딱지 처럼 바닥에 붙어서 잠만 자는 게으른 고양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발밑에도 하나 있어요. - 반항아 말썽꾸러기 고양이. 못하는게 없는 마술사, 도둑, 배우 등 각기 다른 개성과 성격을 지닌, 유머러스하고 사랑스러운 14? 15?의 고양이들의 이야기를 뮤지컬에서는 젤리클 고양이를 뽑는 특별한 밤의 이야기로 잘 엮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뮤지컬과 원작시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리자벨라'입니다. 위에 올린 차례를 보세요. 그리자벨라 이름은 안나오죠? 제가 저 사진을 올린 것이 다 복선이었습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이 시집을 뮤지컬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완성하기까지는 10년이 걸렸습니다. 리허설을 시작했을 때도 캣츠는 노래만 존재했을 뿐 스토리가 없었습니다. 리허설이 끝나갈 무렵 엘리엇의 미망인 발레리 엘리엇이 8줄의 미완성 싯구를 그들에게 건네줍니다. 이 미완성된 부분이 외롭고 늙은 창녀 고양이 그리자벨라 Grizabella, the glamor cat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집이 동화라고 했지요. 출판 할 때 이 이야기가 아이들을 너무 놀라게 할 것 같아서 삭제했다고 합니다. 그 싯구를 바탕으로 명곡 '메모리'가 탄생한 것이죠. 은은한 달빛 아래서 그리자벨라가 자신의 추억을 노래하는 메모리는 누구나 들어본 명곡이죠. 그리자벨라가 타이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도 명장면이지요.
무대에서는 쉴 새 없이 고양이들이 뛰어다니고 싸우고 사랑하고 노래합니다. 정말 떠들썩한 고양이들의 난장판을 보고난 느낌이네요.
그런데 그게 고양이들만의 이야기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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