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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걷다

통영. 박경리와 김약국의 딸들

by 낙타 2021. 3. 3.

통영을 배경으로 한 가장 유명한 소설이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이 아닐까요.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통영의 유지 집안의 흥망성쇠와 다섯 딸의 삶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통영이라는, 항구라는 배경이 어찌보면 특이한 분위기입니다. 흥망성쇠, 삶의 부침이 쉴새없이 몰아치는 곳이 부두가 아닐까요. 하룻밤 사이에 삶과 죽음이 갈리고 만선의 거부가 되는가 하면 파선으로 목숨을 잃고 망하는 곳이 부두이죠. 그래서 유난히 시끌벅적하고 거칠고 또 흥도 많고 한도 많은 곳입니다. 그런 바닷가를 배경으로 시대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까지의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시기를 살아가는 김약국과 그 딸들의 삶은 ...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漁港)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화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통영 주변에는 무수한 섬들이 위성처럼 산재하고 있다. 북쪽에 두루미목만큼 좁은 육로를 빼면 통영 역시 섬과 별다름이 없이 사면이 바다이다. 벼랑가에 얼마쯤 포전(浦田)이 있고 언덕배기에 대부분의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들앉은 지세는 빈약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민들은 자연 어업에, 혹은 어업과 관련된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일면 통영은 해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통영 근처에서 포획하는 해산물이 그 수에 있어 많기도 하거니와 고래로 그 맛이 각별하다 하여 외지 시장에서도 비싸게 호가되고 있으니 일찍부터 항구는 번영하였고, 주민들의 기질도 진취적이며 모험심이 강하였다. - 김약국의 딸들 제1장 중에서

대표작 '토지'의 주된 배경이 하동이라서 고향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박경리의 고향은 통영입니다. 서문고개 부근으로 세병관에서 충렬사 방향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 일대가 어린 시절 박경리 선생님이 살았고 '김약국의 딸들'의 김약국네가 살았던 간창골입니다. 간창골은 삼도수군통제영등 관청 아랫마을이라고 해서 관청골이 변한 이름이라고 하네요. 서문고개는 통영성의 서문이 있던 고개입니다.

박경리 선생의 생가를 찾아 갔는데 쉽게 찾을 수 없었어요. '김약국의 딸들' 표지석이 있는데 그 골목 안에 생가가 있다고 해서 한참 찾았습니다.

사람 두명 정도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을 두 바퀴나 돌았어요. 겨우 찾고 보니 어느 대문 옆에 손바닥보다 조금 큰 푯말이 붙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현재는 박경리 선생님과 연고가 없는 일반 시민이 살고 있으므로 내부는 공개하지 않습니다"라고 알려주네요. 내심 실망했습니다. 통영이 가장 자랑할 작가의 생가가 이렇게 취급되다니... 통영시 등에서 매입하여 관리하는 방법도 있을텐데요.

박경리 선생이 '토지'의 후반부를 집필한 강원도 원주에는 집과 정원을 보존하고 있는 '박경리 문학공원'이 있고 또 '토지문화관'이 있습니다. 서울 성북동에도 박경리 선생이 토지의 전반부를 집필한 옛집이 있지요. '정릉동 토지길'이라고 해서 탐방하는 프로그램도 있다고 합니다. 토지의 무대인 하동 평사리에는 최참판댁을 재건(?)하여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으며 대하드라마 토지의 세트장으로 널리 알려졌고요. 그에 비해서 정작 태어나서 자랐고 또다른 대표작의 배경인 곳에 선생님의 자취가 제대로 알려지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김약국의 딸들'에 나오는 하동댁, 서문고개, 대밭골, 간창골, 명정샘, 충렬사, 수백년된 동백나무,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아직도 존재합니다. 최근에는 서피랑마을로 조성하고 여러가지 프로그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충렬사에 이르는 길 양켠에는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고, 아지랑이가 감도는 봄날 핏빛 같은 꽃을 피운다. 그 길 연변에 명정골 우물이 부부처럼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음력 이월 풍신제를 올릴 무렵이면 고을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 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 - 김약국의 딸들 중에서

작가는 '김약국의 딸들'에서 명정샘을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통영에 박경리 선생님의 흔적이 적은 사연이 있습니다. 박경리의 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딴살림을 차려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습니다. 여고 졸업한 다음해인 1946년 결혼하고 서울로 갔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좌익으로 6.25전쟁중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가 사망했습니다.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네요. 혼자가 된 박경리가 아들 딸을 데리고 통영으로 내려왔는데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의 총각 음악 선생과 재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비난을 많이 받았고 결혼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아들마저 불의의 사고로 잃자 통영을 떠났습니다. 그 이후 박경리는 서울과 원주에 살면서 통영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50년 동안을요. 그러다가 2004년에야 다시 통영을 찾았습니다. 어쩐지 김약국의 딸들의 삶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수구초심. 삶의 마지막에는 고향으로 머리를 돌린다고 했던가요. 박경리 선생님은 자신이 오랜 세월 공들여 가꾼 원주가 아니라 고향에 묻히기를 희망했다고 합니다. 2008년 바램대로 고향의 바다가 보이는 산 중턱에 묻혔습니다. 통영 박경리기념관 뒷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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