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가? 사람이 동물이 아니라 사람인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은 무엇으로 생기는 것일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무엇일까? 도구를 사용해서? 손에 돌도끼나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것이 사람을 정의할까? 이성과 지식? 언어를 사용해서? 사람을 설명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있는 이유를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한 단어로 뭉뚱거려서 사랑이라고 하지만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이성에 대한 사랑, 부모 자식간의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등. 그 중에서 타인에 대한 사랑이다. 인류애 혹은 박애. 좀 더 범위를 좁히자면 인간에 대한 연민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동물들도 자식은 끔찍히 아끼고 이성을 위할 줄 안다. 하지만 다른이에 대한 연민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주요 종교들이 표현은 다르지만 이 인간에 대한 사랑, 연민을 주요 교리로 설파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기독교의 박애, 불교의 자비, 이슬람교의 형제애, 유교 사상의 예와 인, 다른 사람을 어질고 올바르게 대하라는 가르침들 말이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라는 것이 가장 순수하고 밀도도 짙은 것은 연민이다. 연민, 연민은 불쌍한 것에 대한 말하자면 허덕이고 못 먹는 것에 대한 것, 생명이 가려고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없는 아픔이거든요. 그것에 대해 아파하는 마음, 이것이 사랑이에요. 가장 숭고한 사랑이에요." - 박경리 2004년 마산 MBC 특집 대담에서
또 김용의 의천도룡기에서 명교의 사람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 몸을 태우니 이글이글 일어나는 성화 삶이 즐거울 것 무엇이며 죽음이 괴로울 것은 무엇인가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니 오직 광명의 길로 나감이로다
기쁨 즐거움 슬픔 그리고 근심이 모두 진토로 돌아가는 것을 세상 사람 불쌍한 것은 우환이 많음이로다 세상 사람 불쌍한 것은 우환이 많음이로다
우환이 많은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것이 바로 연민이고 사랑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스스로 인간임을 내세울 수 있는 근거고 인간이 동물이 아닌 이유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제목이 의미하는대로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장발장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굶주리는 가족을 위해 빵 한조각을 훔치고 탈옥 시도 때문에 19년이나 감옥에 갇히는 사람의 이야기다. 남은 가족은 어떻게 됐을까? 위고는 뿔뿔히 흩어진 그 가족의 짧은 소식을 전해주지만 장발장의 누나와 조카 여섯은 소설 속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됐는지는 그저 상상에 맡길 수 밖에.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들.
서양에는 대하 소설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은 대하소설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우선 분량이 엄청나다. 어렸을 때 간단하게 읽은 장발장 이야기는 원본을 대하면 깜짝 놀란다. 그리고 등장 인물들의 배경이나 그 시대 프랑스의 이모저모를 세세히 묘사하는 내용도 무척 많아서 그 당시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 당시 출판사들은 원고의 길이를 기준으로 원고료를 지불했기 때문에 작가들이 넉넉하게 작품을 길게 썼다. 예를 들어 내가 가진 번역본의 2권 팡띤느의 슬픔은 840 페이지인데 워털루 전쟁에 대해서 약 90 페이지, 어린 꼬제뜨를 데리고 장발장이 숨어 살게 되는 수도원의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이 약 70페이지다. ㅎㅎㅎ. 위키에 의하면 역대 가장 긴 영어소설 25위다. 프랑스에서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책인데 프랑스 사람들도 원본을 그대로 읽는 사람은 드물고 축약본으로 접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어로는 여러번 완역본이 나왔다. 1962년 정음사. 1993년 범우사. 2002년 동서문화사. 2010년 펭귄클래식. 2012년 민음사. 이렇게 길고 지루한 책의 완역본을 이렇게 자주 내다니 새삼 고맙고 행복하다. 내가 가진 것은 2002년 동서문화사 판이다. 참고로 한국어 최초의 번역은 1914년 최남선이 했는데 제목이 '너 참 불쌍타'였다.
레미제라블에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장발장은 물론이고 전체 소설의 정신적 뼈대를 이루는 주교, 피눈물도 없이 엄격한 법집행을 고집하는 경찰,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들 등. 그 중에서 사기꾼 떼나르디에 가족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면서도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이 가족은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만나게 되는 배경이 되기도 하고 중간중간 등장하다가 마지막 결말에서 마리우스가 장발장에 대한 오해를 풀고 죽어가는 장발장을 찾아가는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소설을 읽어보면 마리우스나 꼬제뜨는 의외로 비중이 작다. 의미있는 것은 둘의 연예 스토리 정도? 마리우스는 그다지 혁명에 투철한 인물도 아니고 사랑에 실패하자 홧김에 친구들의 혁명에 동참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장발장에 의해 바리케이트에서 살아난 이후에는 할아버지와 화해하고 다시 귀족의 삶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꼬제뜨는 어릴 때는 몰라도 나중에는 곱게 곱게 자란 공주님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떼나르디에의 아들 딸인 가브로슈와 에뽀닌느는 가난하고 불쌍하면서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들이다. 제목을 대표하며 빅토르 위고의 연민이 향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가브로슈는 바리케이트에서 총을 맞고 죽으며 에뽀닌느는 사랑하는 마리우스를 향한 총을 가로막고 죽는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캣츠,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등을 제작한 캐머런 매킨토시가 1985년에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나중에 영화로도 제작됐다. 자세한 내용은 검색하면 나오니 생략. 이 BIG 4 뮤지컬에 대해서는 '캣츠'에 관한 글에서 이야기했다.
2021.03.08 - [책과 글] - 뮤지컬 캣츠.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
레미제라블은 살면서 꼭 한번 읽어보아야할 책으로 추천하고 싶은데 뮤지컬을 소개하는 이유는 에뽀닌느의 노래 때문이다. 남장을 한 에뽀닌느가 마리우스의 편지를 코제트에게 전달해주고 돌아가면서 -이 부분은 소설과 약간 다른 듯 - 혼자서 쓸쓸히 부르는 노래, On my own. 꼭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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