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왼손 - SF로 실험한 페미니즘

낙타 2021. 12. 27. 01:35

빛은 어둠의 왼손
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
둘은 하나,
삶과 죽음은 함께 있다.
케메르를 맹세한 연인처럼,
마주 잡은 두 손처럼,
목적과 과정처럼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지 소설 [어스시 시리즈]의 작가이자 그랜드 마스터 어슐러 K. 르 귄의 대표작이며 SF페미니즘의 고전이라는 [어둠의 왼손]이다.

SF 소설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지금까지 SF소설이 사고 실험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을, 인류를 여기저기에 이렇게 저렇게 꾸며진 곳에 데려다 놓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기. 르귄은 '외삽'이라고 부른다. 주어진 자료가 한정되어 있어서 그 이상의 한계를 예측하는 방법이다. 르귄은 SF소설이 단순한 사고 실험 혹은 외삽이 아니라고 말한다.

"슈뢰딩거를 비롯한 다른 과학자들이 사용한 용어인 '사고 실험'의 목적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 사실, 슈뢰딩거의 가장 유명한 사고 실험은 '미래'는 양자 수준에서 '예언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현실을, 현재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SF는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묘사한다...... 모든 소설은 은유이다. SF는 은유이다. SF가 기존 소설과 다른 것은, 우리 동시대 삶에서 커다란 지배력을 가진 것들, 즉 과학, 모든 과학과 기술과 상대주의적이고 역사적 견해들로부터 가져온 새로운 은유를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주여행은 이러한 은유 가운데 하나이다. 대안 사회나 대안 생물학도 그렇다. 미래 또한 그렇다. 소설에서, 미래란 은유이다." - 1796년 서문에서


작가는 [어둠의 왼손]에서 무엇을 묘사할까?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큰 요인은, 그 사람이 남자로 태어났는가 여자로 태어났는가입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그것은 그 사람의 기대, 행동, 사고방식, 윤리성, 태도 등 거의 모든 것을 결정 합니다. 단어. 기호 사용. 의복. 심지어 음식까지도요. 여자는...... 여자는 적게 먹는 편입니다. 하지만 선척적 (선천적의 오자인 듯)인 차이와 후천적인 차이를 구별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심지어 여자가 남자와 똑같이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곳에서도 아기를 낳고 기르는 일은 여전히 여자들이 맡아합니다......"

게센인들이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 우리에게 성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성은 정말로 분명하고 중요한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답은 그동안 어느 정도 변해왔다. 이 소설이 나온 지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성은 여러 가지 문젯거리들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회오리로 점점 커지고 있다. 동성애, 페미니즘, 가족의 정의 등등. 이제는 성 차별의 문제가 대통령 선거의 커다란 쟁점이 되고 있는 세상이다. 언제쯤 이 회오리바람이 멈추고 평화로워질지는 모르겠다. 결정된 성이 있는 지구인들도 게센인들처럼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한 인격체, 한 존재로서만 서로 존중할 수 있을까?


어슐러 K. 르 귄의 헤인 우주에 대해서 작가의 설정을 조사해 보았다. 여러 작품을 통해 정리한 내용이므로 [어둠의 왼손]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도 있다.

헤인과 에큐맨


세계의 기원은 헤인이 출발점이다. 전 우주의 인간들은 무한히 먼 과거에 헤인이라는 하나의 세계에서 퍼져 나와 정착했다. 우주의 지성체는 모두 인간이며 혈연관계는 수백만 년, 아니 그 이상 헤인이 있기 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헤인인들은 백개의 세계에 정착했다. 중간에 있었던 재앙의 시대, '적의 시대'가 600년이 지났다. 에큐멘이 분리되었던 행성들을 찾아다니며 다시 연합시키고 있다. 고립되었던 세계는 다시 연결되고 있으며, 잃어버린 기술과 사상을 재건하는 중이다. 에큐멘은 고대의 공동체를 복원해 모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연합시키고자 한다.

지구도 여전히 있다. 지구인은 테라인이라고 불린다. 각각의 세계에서 모두 자기들의 행성을 지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지구 출신 - 테라인 - 으로 지구에서 7년을 살았다. 지구에서 헤인-다베낭까지 20년, 엘룰까지 50년, 게센까지 17년 걸려서 왔다. 태어난 지 120년 정도 지만 아광속 우주선에서 시간이 짧아지기 때문에 30살이 채 안 되는 나이이다.

'알려진 세계' 에큐멘은 국가가 아니라 협력기구이며 무역과 지식의 교환소 같은 곳이다. 일종의 학교라고 할 수도 있다. 세계 연맹 혹은 연합체로 약간의 중앙 집권 조직을 가지고 있다. 에큐멘은 통치가 아니라 협동을 통해 존재하며 행성에 법을 강요하지 않는다. 회원 행성들은 각자의 법을 따른다. 사상과 기술이 앤서블로 전달되며 물자와 예술품들이 유인 혹은 무인 우주선으로 운반된다. 에큐멘은 로캐넌 행성에서 세금을 걷어갔다.

에큐멘의 기술은 NAFL (Not As Fast As Light) 아광속 우주선을 사용한다. 게센 행성은 헤인에서 아광속으로 67년의 거리에 있다. 게센 행성은 에큐멘의 84번째 세계다. 가장 가까운 애큐멘 세계는 17광년 거리이며 가장 먼 세계는 250광년 떨어져 있다.

순간 통신기 기술도 있다. 아광속 우주선이 가장 빠른 이동 수단에서 몇백 광년의 세계를 순간 통신기 앤서블이 연결한다. 앤서블 교신기로 이 모든 행성들은 실시간으로 대화하고 정보를 주고 받는다. 앤서블은 전파를 사용하지 않고 어떤 형태의 에너지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동시성 상수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며 중력과 어느 정도 닮은 면이 있다고 설명된다. 한 지점은 어느 정도 질량이 있는 행성에 고정되어 있어야 하지만 다른 한쪽은 이동이 가능하다. 앤서블은 두 지점에 동시에 메시지를 만든다. 양자 얽힘 그런 건가?

에큐멘은 마음의 언어 즉 텔레파시를 사용한다.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 중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에서 로캐넌이라는 고지생학자가 인류 돌연변이 사이에 학습할 수 있는 텔레파시 능력이 존재한다고 보고했다. [어둠의 왼손]시대에서는 마음의 언어, 텔레파시 능력이 가르칠 수 있는 기술임이 알려졌다. 주인공 겐리 아이는 마음의 언어를 사용한다.

게센인들의 성


어둠의 왼손의 시간적 배경은 에큐멘력 1492년이며 헤인 사이클 93이다.

과거에 헤인의 인간 집단을 원시인류인 토착민이 사는 식민지에 정착시키고 인간 유전자를 조작했다. 로캐넌이나 게센에 있는 인간들의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은 유전자 조작 실험의 결과물이다. 게센 행성은 헤인인들이 와서 처음 4~5만 년 동안은 기후가 매우 온화했다. 그러다가 빙하기가 오자 헤인인들은 철수하고, 개척민들만 남아서 실험이 중지된 것이다. 실험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지속적인 성적 능력을 갖지 않은 인간이 지성적이고 창조적인 문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을까? 혹은 지속적인 성적 능력이 조직화된 사회적인 공격성, 즉 전쟁의 원인인지 확인해 보려고 했을 수도 있다.

에큐멘의 조사대는 약 40년 전에 처음 게센에 왔으며 1년 동안 정체를 숨기고 게센을 여행했다.

게센인의 성의 주기는 평균 26-28일이다. 21 ~ 22 일 간은 성의 잠재 단계이며 양성 병존체인 '소메르'다. 게센인들은 중성이 아니다. 잠재적이고 완전한 형태의 양성을 가지고 있다. 18일째 되는 날에 뇌하수체의 작용으로 호르몬 변화가 시작되며, 22일 혹은 23일째 되는 날 각자는 '케메르' 즉 발정기에 들어간다. 케메르의 1단계에서는 개인은 완전한 양성체다. 강렬한 성적 충동에 휩싸인다. 그러나 혼자 있으면 성과 성교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 2단계는 성별과 성교 능력이 일어나는 상호 과정이다. 케메르 중인 상대를 만나면 호르몬 분비가 더욱 왕성해지고 한 명이 남성 또는 여성으로 정해진다. 짧은 시간 안에 파트너는 다른 성이 된다. 3단계인 절정 단계는 이틀에서 닷새 동안이며 성적 충동과 성교 능력이 최고조에 달했다가 갑자기 끝나버린다. 임신이 일어나지 않으면 짧은 시간 안에 소메르 단계로 돌아온다. 임신을 하면 여성의 성이 유지되다가 수유기가 끝나면 다시 소메르로 돌아간다.

사회적으로 케메르는 한 쌍이 일반적이지만 집단내 난교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엄격한 일부일처제의 맹세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동기간의 근친상간도 허용되고 아이도 낳는다. 세대 간의 근친상간은 엄격히 금지된다. 누구나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기에 역으로 누구도 '여자'로서 임신과 출산, 육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남자'도 없다. 각자는 오직 하나의 인격체로만 존중되고 판단된다.

게센 행성인들의 성에 대해 작가는 4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생각한 혹독한 겨울의 세계는 독특한 면이 있는데, 바로 전쟁이 한 번도 없던 세계란 점이다. 게센인들은 인간의 호전성을 다 가지고 있었으며, 반목, 약탈, 언쟁, 살인 등 모든 것을 했지만 그 호전성을 조직으로 꾸미지는 않았다. 게센인들에게는 군대와 전쟁이 없었다. 전쟁이 없는 세계를 상상하려던 내 마음은 남자가 없는 세상에 도착하게 되었다. 남자 자체가 없는 세상, 늘 남자인 존재, 자신을 증명하려는 존재가 없는 그런 세상에......"

초기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에는 에큐멘에 가입한 이후 게센의 에피소드인 [겨울의 왕]이 실려 있다. [겨울의 왕]은[어둠의 왼손]을 쓰기 1년 전에 썼다. [겨울의 왕]을 먼저 썼지만 헤인 우주에서의 시간은 [어둠의 왼손]이 앞 시대다. 르귄은 말하기를 [겨울의 왕]을 쓸 때만 해도 게센인들이 양성인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겨울의 왕]이 출판될 무렵에야 게센인이 양성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나중에 작가는 [겨울의 왕] 개정판에서 모든 게센인들을 칭하는 대명사를 여성형으로 바꾸었다. 왕 King 같은 남성형 명칭은 queen 으로 바꾸지 않고 성을 모호하게 하기 위해 남겨두었다.

게센 행성은 네 나라가 있다. 그중에 카르히데와 오르고레인이 무대다. 두 나라의 사이는 나쁘지만 전쟁은 없다. 국경 지역 계곡의 소유권을 두고 서로 농부들을 습격하며 티격태격하는 정도다. 무기라고 해봤자 몽둥이와 총 정도. 카르히데어에는 '전쟁'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남자가 없어서 전쟁이 없는 것일까? 작가도 그것만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여자들만 있다고 전쟁이 없을까? 내 생각에는 아닐 것 같다. 여자들을 너무 무시하는군. 비둘기들도 자기들끼리 싸울 때는 독수리에 못지않게 난폭하고 잔인하다.

게센에 전쟁이 없는 이유는 기후도 한 원인이다. 겨울 행성의 날씨는 생명체에게 인내의 한계에 이르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할 여력은 없을 것이다. 게센인들의 가장 큰 적은 잔인한 환경, 추위다.

성별 없는 게센인들의 성인식을 그린 [카르히데에서의 성년이 되기]가 단편집 [세상의 생일]에 실려 있다.

줄거리


지구 출신의 주인공 겐리 아이는 홀로 행성 '게센'에 에큐멘의 사절로 왔다. 인류의 평화를 추구하는 에큐멘 연합에 가입도록 '게센'의 국가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에큐멘에 호의를 보이던 카르히데의 고관 에스트라벤은 왕에 의해 추방당한다. 위협을 느낀 겐리 아이는 오르고레인으로 탈출한다. 오르고레인에서 겐리 아이는 체포되어 수감된다. 에스트라벤이 그를 구해주고 둘은 우주선에 연락하기 위해 빙하를 넘어 목숨을 건 여행을 시작한다.

[어둠의 왼손]에서 양성이나 페미니즘은 의외로 중요하지 않다. 이 소설은 게센인의 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게센인과 테라인이 어떻게 서로 이해하게 되는지가 주제다. 물론 겐리 아이는 양성인 게센인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테라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성 구별의 문제만 아니다. 하나의 예로 '시프그레소'라는 카르히데 단어가 있다. 위신, 체면, 지위, 자존심이 복합적으로 얽힌, 다른 말로 옮길 수 없는 카르히데의 사회적 권위와 게센 문명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겐리 아이는 이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번역할 수도 없다.

새로운 번역판에 실린 르 귄의 '40주년 기념판의 서문'과, '1976년의 서문'은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작품의 집필 과정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작가 노트와 초기 설정 자료, 게센 행성 지도 등 부록들도 흥미롭다.

제목 '어둠의 왼손'은 무슨 의미일까? 겐리 아이는 태극 문양을 에스트라벤에게 보여준다. 음과 양, 빛과 어둠, 삶과 죽음, 마주 잡은 왼손과 오른손, 여자와 남자, 연인처럼 둘은 하나이다.